"누가 아들 좋다고 했노. 키워봤자 아무 소용없다. "
"내 팔자가 얼마나 사나우면 딸 집에 있겠노."
엄마는 연락을 잘 하지 않는 아들의 무심함이 가슴에 사무칠 때면 이와 같은 넋두리를 몇 시간이고 늘어놓았다.
그 넋두리가 피곤하게 느껴질 무렵 나는 진심 반, 가식 반의 말로 엄마의 넋두리를 가라앉힌다
"엄마, 요즘 세상에 아들, 딸이 어디있노. 오히려 딸하고 살면 살지, 아들하고는 못 산다. 그리고 엄마가 나 키울 때 똑같이 키웠는데, 왜 딸 집에 있는 걸 눈치 보는데. 똑같은 자식인데 당당하게 있어라. "
그러면, 엄마는 대번 표정이 밝아지며 넋두리를 멈춘다.
나의 남편은 집안일을 잘 돕지 않는다. 하지만 아주 가끔 설거지를 하는데, 그럴 때 엄마는 무슨 큰일이라도 난 듯이 사위를 말리고 나선다. (사위를 그다지 좋아하는 편도 아닌데 말이다.)
" 무슨 남자가 설거지를 다 하노. 비끼라. 내가 하께"
" 아이고, 니는 어떻게 설거지를 해 주는 남편이랑 사노. 그것도 니 복이다. "
평소 집안일을 잘 하지 않는 남편에게 불만이 있는 나는 엄마의 이런 말에 한 편으로는 화가 나려 하고, 한 편으로는 격세지감을 느낀다. 평소 사위가 조금만 섭섭하게 해도 나에게 슬쩍 사위 흉을 보는 엄마가 평소 집안일을 돕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불만을 갖기는 커녕, 아주 가끔 돕는 것에도 놀라워 하고 칭찬하는 모습을 보이니 말이다.
사실 엄마는 그 시절 치고 아들, 딸을 구별없이 키워주셨다. 30년생 엄마에게는 최선의 방식으로 나를 키웠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아들과 딸, 남자와 여자의 역할에 대한 엄마의 인식이 그 시대의 가치관을 뛰어넘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그 시절 내가 엄마에게 받은 차별 중 기억에 남는 것은 다음 두가지이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나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피아노 학원을 다니고 싶다는 말을 엄마에게 했었다. 엄마는 집안 형편을 들어 허락해주지 않으셨지만 그 시절 피아노 학원을 다니는 일은 일반적이지 않았으므로 내게 상처가 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그 일이 또렷이 기억나는 걸 보면 내 마음 속에 큰 아쉬움으로 남아 있는 모양이다. 그리고 몇년 뒤 남동생은 태권도 학원을 다니게 되었는데 나는 그때 별 의식이 없어서인지 특별히 차별이라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또 내가 맏이였기 때문에 느끼는 숙명적 수긍도 있었다. 그 시절 많은 큰 딸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래서 내가 맏이이기 때문에 바쁜 엄마를 대신해 동생을 챙기고, 집안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엄마는 나에게 의도적으로 집안일을 맡기지 않았다. 그래서 게으른 맏딸을 둔 우리집은 항상 엉망이었지만 그걸로 엄마는 나를 나무란 적이 없었다. 하지만 엄마는 본인 혼자 하기에는 힘에 부치는 일의 경우 항상 동생이 아닌 나를 불러 같이 하게 하거나, 엄마가 없을 때 처리할 일이 있으면 꼭 나를 시켰다. 그때는 그저 '엄마가 하라고 하니까', 그리고 '내가 안하면 엄마를 도울 사람이 없으니까' 라는 생각으로 각종 집안일을 했다. 굳이 동생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다가도 걱정없이 놀기만 하는 동생이 살짝 부럽기도 했다. 하지만 돌아보니 그것도 맏이이기 이전에 딸이기 때문인 이유도 있었다.
또 하나는 고등학교 진학 할 때이다. 그 당시는 여학생의 60% 이상이 실업계 고등학교를 가던 때였다. 그 시절에도 가난한 편에 속했던 내가 인문계 고등학교를 가겠다고 하자, 주변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다. 엄마는 내 의사를 받아주는 대신 대학은 교대를 가야 한다고 신신당부했었다. (하지만 몇 년뒤 남동생이 상업 고등학교를 가겠다고 하자, 엄마는 며칠 동안 한 숨을 쉬며 고민했었다.) 그렇게 나는 인문계 고등학교에 갔고, 주변 친구들이 나에게 대학 갈 때 어느 과를 갈 것이냐고 물었을 때 나는 왠지 교대에 지원할 거라는 말이 선뜻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 당시 멋져보였던 신문방송학과를 갈 거라고 둘러댔었다. 내가 가장 아쉬웠던 것은 그 시절 내가 원하는 꿈을 한번도 꾸어보지 못한 것이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고민할 기회조차 갖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 나의 아들에게는 너의 꿈을 꾸라고 말한다. 너의 꿈과 상관없는 이유로 너의 꿈을 미리 제한하지 않겠다고 나는 다짐한다. 그렇게 세상의 시류를 고려하지 않는 철없는 엄마로 후회할 지언정, 너의 꿈을 꾸라고 응원하게 된 이유이다.
경제 발전이 정점을 찍던 80년대에 경제 부흥의 신바람과 함께 한 쪽에서는 빈곤의 그늘도 깊어갔다. 그 시절 친구들보다 가난하다는 것을 느끼던 나는 의기소침한 아이로 청소년기를 제법 아프게 지나왔지만, 그 시대를, 그리고 부모님을 원망하지는 않는다. 산업화가 고도화 되던 그 때 온전히 자기 꿈을 꾸지 못한 아들과 딸이 나뿐이었으랴. 그리고 전통의 힘이 여전히 건재하던, 딸의 희생을 당연하게 여기던 그때, 자신의 꿈을 말하지 못해 가슴 무너졌던 딸이 또 나뿐이었으랴.
피아노학원을 다니고 싶었는데 다니지 못한 이야기를 몇 년전 엄마에게 우연히 하자, 엄마는 화들짝 놀라며 그런 적이 있었냐고 하였다. 그러면서 미안하다고 말하였다. 나는 손사래를 치며 아니라고 말했지만, 엄마는 너무나 미안해 했다.
아들이 보고프고 딸이 섭섭할 때면 엄마는 또 푸념 한 바가지를 쏟아부을 것이다. 그러면 나는 '서러웠던 시절 속에서도 당신덕분에 이만큼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 너무 감사하다고, 그러니 이제 좀더 어깨 펴고 딸과 함께 하는 노후를 당당히 즐기시라' 고, 두 손 꼭 잡고 말씀드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