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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된 남자 이야기

by 연구하는 실천가

내가 본 한국영화 중 가장 인상 깊었던 작품을 꼽으라면 <광해, 왕이 된 남자>이다. 훌륭한 지도자는 뛰어난 능력과 심오한 학식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가슴 깊은 데서 올라오는 뜨거운 진심과 공감 능력으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임을 영화는 말하고 있다. 그래서 진짜 광해가 오히려 가짜 왕이고, 가짜 광해가 진짜 군주라는 역설을 가짜 왕을 따르는 이들의 감화된 태도를 통해 보여준다.

혁신적이고 실리적인 광해와 잔인하고 패륜적인 광해라는 한 인물모습은 이야기꾼에게 흥미로운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어쩌면 광해는 얼굴이 닮은 서로 다른 두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역사 속 실제 광해가 그런 두 얼굴을 가졌던 것이 권력투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고뇌의 결과였는지, 혹은 쫓겨난 왕이기에 진짜의 모습에 덧칠될 수밖에 없었던 억울한 면이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래서 조선시대 가장 나약하고 비열하기까지 하다고 불리는 선조와 인조 사이에서 핍박받고 버려진 왕이어서 더욱 빛이 나는 그의 실제 모습이 영화나 드라마처럼 그렇게 매력적이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현재 우리가 바라보는 광해는 주어진 순리와 제도를 과감히 거스르며 용기 있게 실리와 혁신의 삶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간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그래서 이런 광해의 매력을 소재로 한 영화나 드라마가 끊임없이 등장했지만, 특히 흥미로운 이야기가 최근 종영한 드라마 [왕이 된 남자]이다. 나는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를 너무나 재미있고 감동적으로 보았기에, 처음 이 영화가 드라마로 리메이크된다는 소식에 그 뻔할 것 같은 스토리 전개가 예상되어 보고 싶은 마음이 별로 일어나지 않았다. 언뜻 본 초반 부분은 역시나 영화의 모습을 그대로 답습하는 듯 식상하였지만 중반을 넘어서는 시점부터 우연히 다시 본 이 드라마는 영화가 보여주지 못한 지점을 아주 새롭게 구축해 나가고 있다. 그러니까 영화를 보며 느낀 광해의 모습에서 뭐라고 말하기는 애매하지만, 굳이 비유하자면 근질거리는 등짝의 손이 닿지 않는 어떤 지점을 긁지 못하고 있는 것 같은 답답함이 있었다.


영화에서는 주로 대동법을 중심으로 배우 이병헌의 뛰어난 연기력에서 나오는 투박한 말투 속에 진심의 울림이 느껴지는 직설화법으로 애민 정신을 속사포같이 드러내며 관객에게 현실 속 답답함을 던져버리게 하는 시원함을 안겨주었다. 하지만으로 그것은 이병헌의 매력에 가까웠고 광해의 매력을 충분히 보여주기에는 뭔가 아쉬웠다. 그런데 드라마는 긴 호흡으로 광해의 중립 외교, 주변 기득권 세력과의 갈등을 흥미로우면서도 과감하게 전개하였다. (이 드라마에서는 광해가 아닌 광해를 모델로 한 허구 속 왕의 이야기이다. 그래서 역사를 초월한 이야기의 변주가 훨씬 다채롭다. )

파격적인 이야기의 전개는 무엇보다 실제 왕의 죽음에서 본격화된다. 실제 왕이 죽임을 당하다니. 그것도 역적이 아닌 충신의 손에 의해서. 이런 역발상에서 이야기는 한층 깊게 들어간다. 가짜 왕이 정말 왕이 되어버리는 상황이 전개된 것이다. 그것도 진짜 왕이 믿었던 최측근이면서, 드라마 속 충신의 화신과 같았던 이규(김상중 분)라는 신하에 의해서 말이다. 이런 파격에서 이 이야기는 내가 영화에서 느꼈던 근질거림을 해결해 주었다. 조선시대 왕의 이야기에서 충신은 설사 왕이 의롭지 않더라도 그런 왕을 안타까워하며 지키는 것을 충으로 표현하는데 ( 악한 왕이라도 주인공이 직접 처단하는 모습을 의인으로 그리기가 쉽지 않다.) 왕을 바꾸어서라도 바른 정치를 꿈꾸는 것. 어쩌면 이것이 실제 광해군 시대 이규의 실제 모델인 허균의 이루지 못한 꿈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왕의 혈통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 왕은 왕다울 때 왕인 것임을 보여준다. 그래서 실제 역사에서 꽉 막혔던 고구마 같던 광해군 이야기는 드라마 속에서 날개를 활짝 펴고 해피엔딩으로 부활한다.


두 번째 파격은 신하 이규의 태도에서이다. 가짜 왕이라는 사실이 드러날 때마다 그것을 알게 된 신하들과 중전은 처음에는 가짜 왕을 거부하지만 점차 왕진심에 감동하여 진정한 왕으로 받아들이는데, 오직 이규만은 자신이 세운 왕임에도 이야기가 끝나가는 시점까지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하대를 하는 모습을 보인다. 스스로 가짜 왕에게서 진짜 군주의 모습을 느끼게 되고 그래서 진짜 왕으로 만들고자 자신이 진짜 왕을 죽이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이규의 이면에 자신의 대의에 맞지 않으면 과감히 왕이나 대군도 죽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가짜 왕이 문득 그의 진심을 의심하는 순간, 이규는 기다렸다는 듯이 모든 것을 던지고 그를 떠나려 한다. 그 순간 가짜 왕은 이규의 진심에 대해 강한 믿음을 보여주게 되고, 이규는 스스로 악인이 되더라도 나라를 구하고자 하는 자신의 진심을 바라봐준 왕을 향해 비로소 무릎을 꿇고 그를 왕으로 받들게 된다. 그리고 그 이후 그의 모습은 왕을 따르고 헌신하는 모습 그 자체로 완전히 바뀌어 버린다. 이런 장면은 오로지 배우 김상중이기에 가능할 만큼 변화된 모습을 아주 드라마틱하게 뛰어난 연기로 보여주며 그 진가를 발한다.

실제 상황에서 왕이든, 대통령이든 진심만 가지고 자신이 꿈꾸는 정치를 할 수는 없다. 그래서 광해도 현실에서는 그렇게 무너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지금의 현실 정치도 복잡한 국제 정세와 사회 구조 속에서 지도자의 이상은 변곡을 그리며 안갯속을 헤매고 있다. 하지만 영화보다 드라마는 느리게 가기 때문에 손이 닿지 않았던 근질거린 등짝을 속시원히 긁어주었던 것처럼 결렬되어 버린 북미 정상회담도, 사회 전반의 여러 문제들도 이상주의자 이규가 눈물을 흘리며 진짜 왕을 죽인 것처럼 권력자의 욕심과 아집도 죽이고, 주변 사람들의 권력욕도 죽이고, 각 이익집단의 이기심도 죽이고, 국민들의 조급함도 죽인다면 드라마 속 해피엔딩처럼 서서히 풀리지 않을까 꿈꾸어 본다. 일개 집순이의 드라마 이야기에서 북미회담까지 나가다니 헛웃음이 나오지만 나 같은 대중들은 사실 소소한 드라마에서 오히려 거대담론의 철학을 배우는 경우가 종종 있으니 읽는 이들은 너무 비웃지 마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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