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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구하는 실천가 Mar 23. 2019

가난이 뭐냐고 물으신다면

 "가난한 게 어떤 건지 잘 모르겠어요."


아들의 말에 우리 부부는 아연실색하였다.

 '우리가 아이를 너무 배부르게 키운 걸까?'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남편은 한심하다는 말투로 아들에게 허둥지둥 설명하고 있었다.

 " 바보야. 밥 사 먹을 돈도 없고... "

 " 그 정돈 저도 알아요. 그냥 잘 와 닿지 않는다는 거지."

 아들은 무심결에 엉뚱한 소리를 잘 던지고, 우리 부부는 심각하게 그 말의 의미를 찾아내고자 분주해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오늘도 우리 부부는 별생각 없는 아들의 말에 요란한 의미 부여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나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해 주었다.

"가난하면 말이야, 하지 않아도 되는 고민들을 하게 되는 거야. 그것도 아주 묘한 씁쓸함을 곱씹으면서.

 예를 들면, ' 새 학년이 되어 문제집을 살 때 뭘 살까 고민하는 거야. 수학 문제집만 사야겠지?  과학까지 산다고 하면 부모님께 좀 미안하겠지?' 하는 생각 말이야. 또,  '수학여행을 그냥 안 간다고 해볼까?  여행비도 많이 들고 이것저것 필요한 것도 사야 되는데 그냥 가지 말까?' 하는 생각도 하게 돼. 그리고, 돈이 필요하다고 부모님께 말할 때 괜히 눈치가 보이고, 부모님도 굳은 표정으로 알겠다고 할 뿐 언제 주신다고 딱 말해주지 않는 거야. 그냥 무작정 기다리다 마는 거지."

  나의 이야기를 듣던 아이는 약간 눈이 커지며 조금 이해를 하는 눈치였다. 물론 나의 어린 시절과 지금 아이들이 가난함을 느끼는 지점은 다를 것이다.


 지방의 작은 신도시, 비슷비슷한 아파트들이 모여 있는 단지 내에서  초중고를 다니고 있는 우리 아이가 만나는 사람들은 다 비슷한 집, 비슷한 생활 모습을 하고 있다. 그래서 아이가 아는 가난은 텔레비전 드라마나 뉴스에 나오는 것이 거의 전부라 할 수 있다.  

  아이는 경제학자가 꿈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돈에 대한 관념이나 소유욕이 없는 편이다. 그래서 가족이나 친척들이 용돈을 주면 아무 곳에나 던져두고는 잊어버려서 어른들의 지적을 받곤 한다. 그만큼 돈에 대한 애착이 없다.  그것을 두고 주변 사람들은 아들 하나라고 풍족하게 키워서 그런 것 같다고 말하기도 한다.  평소에 뭘 갖고 싶다는 소리를 거의 하지 않는 아이라서 뭔가 사고 싶다고 하면 나는 군말 없이 쉽게 사 주는 편이긴 하다.  심지어 친구들도 다 가지고 있는 휴대폰도 사달라는 소리를 하지 않아, 부모인 우리가 불편해서 초등학교 5학년 때 우리 손으로 사 주었다.  물론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후회했지만.


   가난을 겪어보거나 적어도 깊게 생각해 본 사람과 가난에 대해 무관심한 사람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나 물질에 대한 가치관에 있어서 상당한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유복하게 자랐지만 주변의 가난한 사람들을 돌아보았던 이들 중에 그들을 위한 시민운동이나 노동운동에 자신의 삶을 헌신하는 경우도 있다.  나의 경우, 소소한 행복을 추구하는 성향도 작용했지만 어릴 때 가난을 나름 경험했기 때문에 돈에 의미를 크게 두지 않는 편이다.(물론 반대로 가난이 더욱 돈에 집착하게 만들기도 한다.)  어쩌면 큰 돈을 써본 적이 없기에,  돈의 맛을 잘 모른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다행히 지금 버는 돈으로 의식주가 그냥저냥 해결되니 딱히 돈이나 물건에 대한 욕망이 안 생긴다.  홈쇼핑 사은품으로 받은 가방을 몇 년째 들고 다니고, 오랫동안 경차를 몰았다. (지금은 남편이 몰던 중형차를  모니 이제 경차를 몰 자신이 없다. 돈의 맛이 무섭긴 하다. ) 그래서 돈을 모으는 것에도 관심이 없고 심지어 남편의 월급이 얼마인지도 정확히 모른다. 그저 내가 가치를 두는 유기농 식품을 종종 사고, 맛난 음식을 사 먹는 것으로 작은 사치를 누린다.


   반면에 현실주의자인 남편은 돈에 대해 민감하다. 재테크 정보를 모으고 돈이 되는 아이템에 골몰한다.

 " 미세먼지가 심한 요즘 같을 때 어떤 아이템이 사업이 되겠냐?"

 " 아까 커피믹스 비닐을 왜 일반 쓰레기통에 버리냐. 미세먼지 많은 줄 알면 분리수거 좀 해라."

 나와 남편은 이렇게 서로 동문서답을 하기 일쑤이고, 서로의 성향이 다름을 알기에 더 이상 서로에게 답을 기대하지 않고 그냥 넘어간다.


 가난은 돈이 없기 때문에 상처 받는 것이 아니다.  가난에 대한 사람들의 편견 때문에 상처 받는다.

그래서 가슴에 텅 빈 암흑 구멍 하나가 뚫린 것 같은 헛헛한 기분으로 살게 한다. 그래서 가난은 마음의 감기처럼 으슬으슬 한기가 들 듯 마음을 움츠리게 한다.

경제 개발의 70년대에 어린 시절을 보냈던, 그리고 한창 아파트 단지가 생겨나며 중산층이 폭발하던 80년대에 중고등학교를 다니던 내가 느꼈던 가난은 그런 느낌이었다.


 아이는 그런 나와 남편을 딱 반반씩 닮았다.  돈에 의미를 두지도 않고 물건에 대한 소유욕이 없으면서도 돈의 흐름과 움직임에 대한 관심은 많다.  자기 돈은 줄줄 흘리고 다니면서 시장과 경제 이야기가 나오면 아빠와 한 시간 넘게 설전을 벌인다. 나는 재미없는 경제 이야기를 듣다 말고, 둘 다 분리수거나 똑바로 해라고 일갈하며 드라마를 보기 위해 거실 소파로 옮겨 앉는다.  


 내가 아이였을 때 느낀 가난은 그 당시 내 부모님이 겪었던 생존의 문제에 비하면 그저 어쭙잖은 어리광 같은 것이다.  과거 사교육이 없던 시대, 친구들의 옷차림과 집의 크기, 가전제품의 유무 정도에서 느꼈던 나의 가난에 비해 지금은 얼마나 더 날카롭게 가난은 아이들의 마음을 베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그래서 감히 가난이 어쩌고 하는 나의 이야기가 얼마나 건방진 것인가 두렵기도 하다. 그래도 일천한 나의 경험에 비추어 누군가 나에게 가난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뻔한 소리지만 이렇게 답하고 싶다.


  그저 불편한 것이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그당시 가난을 부끄러워 했던 내가 정말 부끄럽지만 그때 나는 철없고  어리석은 10대 소녀였을 뿐이다.)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적 격차는 어쩔 수 없이 존재한다. 나도 서울 강남에 가면 하위 10% 인 것처럼. 하지만 가난은 누구의 잘못이 아닌 그저 삶의 과정이다. 누구나 좋을 때도 있고 힘들 때도 있는 것처럼. 그렇게 지나가는 과정이라 받아들이고 잘 견디고 이겨내면 된다. 그러려면 가난은 한 번 빠지면 헤어 나오지 못하는 수렁이 아니라 언제든 기회가 오면 누구나 벗어날 수 있는 정거장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 기회는 수시로, 여러 차례 주어져야 한다. 그럴 때 가난은 삶의 일부이고 조금 불편한 것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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