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정말 선하게 태어나긴 하는 걸까?]
나는 노력해도 잘하지 못하는 일을 누군가가 운이 좋거나 능력이 남달라서 (아마 나보다 더 노력했을 가능성이 높지만)나보다 쉽게 해낼 때 그것을 바라보는 질투심과 비슷한 나의 감정에 스스로에게 환멸을 느낄 때가 가끔 있다. 나의 속좁음과 착하지 못함으로 그의 성공을 진심으로 기뻐하지 못하는 비루한 나 자신을 마주하는 기분이란...
그래서 요즘 드는 쓸데없는 생각.
나는 정말 착한 사람인가?
그리고 인간은 정말 선하게 태어나긴 하는 걸까?
어린아이들을 보면 자기보다 약한 존재이거나 자기의 이익을 위해, 심지어 아무 이유없이 다른 아이를 괴롭히거나 놀리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그래서 누군가는 아이는 순수한 악마라고도 했다.
또 진화론에서 말하는 적자생존의 법칙을 따져 보면 인간은 절대 선하게 태어날 수 없지 않을까? 나를 지키려면 이기적인 본능을 세워 생존게임에서 살아남아야 하는데, 선함은 그에 어울리지 않는 영역인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본성은 정녕 악한 것인가?그리고 선함은 오로지 후천적 노력으로 길러지는 특별한 능력인 것일까?
하지만 생각해 보면 때로 우리는 나의 이익과 전혀 상관없는 약자를 응원하거나 억울한 일을 겪는 사람을 보면 자연스럽게 함께 분노하기도 하지 않는가? 이것을 진화론적으로 설명해 보면, 나약한 신체를 가진 인간이 매머드와 같은 강한 동물을 사냥하기 위해서는 공동체 의식과 협력적 자세를 발달시켜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서 공감능력, 타인에 대한 배려가 생겨났을 것이다. 그래서 선함도 인간의 진화 과정속에서 설명할 수 있는 본성이 된다. 따라서 이런저런 생각 끝에 내가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다.
인간은 진화론적으로 보았을 때 선함과 악함을 적절하게 함께 가지고 태어난다. 그러니 사촌이 땅를 사거나 남이 잘되어 이유없이 내 배가 자동으로 아프다 해도 나의 지질하고 못난 모습을 너무 자책하지 말자. 그것은 본성이다. 하지만 우리는 또 다른 본성이 있다. 바로 착함이다. 또 다른 본성인 착함을 세련되게 갈고 닦아 본능적인 선과 악의 심성을 상황에 따라 스스로 무엇이 중요한지 가치를 따져 생활하는 멋진 착함을 뽐내어 보자. 그런 의미에서 나의 착함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해본다.
나는 어릴 때부터 착하다는 말을 제법 들으며 살아온 편이다. 뭘 욕심내거나 주장해 본 적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남편은 가끔 아들에게 말한다.
" 너희 엄마 정말 착하제."
우리 반 아이들도 가끔 말한다.
"선생님은 참 착하세요."
그래서 나 스스로도 내가 제법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그게 나의 유약함을 드러내는 콤플렉스이기도 했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는 딱히 착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저 주어진 상황을 거스르기 귀찮고 두려웠을 뿐이었다. 뭔가를 바꾸려 하면 불편한 상황이 발생할 것이고 그런 상황을 수습하거나 받아들일 용기가 없었다.
그건 착함이 아니고 무색무취의 순수함과 우유부단함 그 어느 지점에 있는 마음 상태였다.
그래서 남편의 그 말뜻은 '너희 엄마는 자신을 챙기기보다 가족을 위해 헌신하고 남편 말을 잘 듣는다'정도이고, 아이들의 말뜻은 '선생님은 우리말을 잘 들어주고 안 혼내서 조금 만만해요.' 정도라고 이해한다면 나의 삐뚤어진 자격지심 탓인 걸까?
대학 때 무척 마음이 넓은 동기이자 친구가 있었다. 그녀는 항상 친구들의 뒤치다꺼리를 열심히 하곤 했는데, 그날도 둘이서 해야 하는 세미나 준비를 혼자 몇 시간째 하고 있었다.
그걸 별스럽지 않게 생각하고 놀기 바쁜 그녀의 파트너의 모습도 나는 얄미웠지만 그걸 또 말없이 혼자 하는 마음 넓은 그 친구가 사실 더 마음에 들지 않았다.
" 왜 네가 그걸 다 하는데? 네 도덕군자 같은 모습이 정말 짜증 난다."
나는 착한 그 친구에게 괜히 심술궂은 말을 내뱉었고 그 친구는 아무 항변도 하지 않고 난처한 표정과 부드러운 미소로 나를 바라보아 내 속을 더욱 불편하게 하였다. 또 그 시절 나의 과제물을 누군가에게 빌려줬는데, 그것이 과 전체를 돌고 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나는 여럿이 있는 자리에서 그만 폭발하듯 화를 냈었다. 그들은 내 과제 내용이 정말 좋았다는 이야기를 별 뜻 없이 하고 있었고, 나는 그 순간 내 과제가 여기저기 돌아다닌다는 사실에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그리고 그 후 며칠간 나의 가식적 착함 뒤에 숨겨진 내 본연의 모습을 들킨 것이 부끄러워 고개를 숙인 채 다녔었다. 그때 차라리 도덕군자가 되어 그들의 칭찬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미소 지었다면 그들은 나의 대범함에 감동했을까? 아니면 처음부터 착한 척하지 말고 과제를 빌려달라던 친구에게 빌려줄 수 없다고 분명하게 말했더라면 냉정하지만 원칙을 지키는 사람으로 보였을까? 그렇게 나의 삶의 궤적은 '모두 좋으면 다 좋은 것이겠지. 그런데 이 찜찜함은 뭘까?' 정도의 심리 상태로 명확히 착하지도, 정확히 계산적이지도 못한 다소 어정쩡함이 아니었던가 한다.
그래서 지금 계속 내가 말하고 있는 이 '착함이란 뭘까'를 굳이 정의 내려보자면 '타인을 생각해서 기꺼이 나 자신의 욕망을 절제하는 마음 '쯤이 아닐까 한다. 그래서 내가 가진 착함은 사실 나의 욕망을 기꺼이 절제한 것이 아니라 남의 감정 눈치보기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타인뿐 아니라 내가 모르는 또 다른 타인의 선함을 훼손한다면 그런 맹목적 선함은 오히려 위선이라 하겠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과제물을 빌려주어 베끼게 하거나 혼자 준비한 세미나로 함께 좋은 점수를 받는 것을 선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래서 이제 무색무취의 착함이 아닌 색깔있는 착함의 기준을 찾아야 한다. 즉 타인의 시선이 기준이 아니라 내 양심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과거 내가 '나는 아무것도 몰라요. 그저 나로 인해 누군가가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따위의 소극적 착함으로 문제를 회피했다면, 이제 문제를 통렬히 돌아보고 때에 따라 스스로를 통제하거나 안일함의 벽을 깰 수 있는 적극적 착함을 향해 움직여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요즘 나는 '착하다'는 말을 잘 듣지 못한 것 같다. 나이를 먹어서도 있겠지만, 예전보다 조금은 나 스스로 타인의 시선에 흔들리기보다 나의 줏대를 기준으로 타인을 생각하는 마음을 가지려 노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회색빛 우유부단함에서 나만의 색깔로 조금 더 짙어졌다.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요즘 들어 예전보다 진정한 의미에서 조금 더 착해진 걸 느낀다.
그럼 당신은 얼마나 착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