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남편은 단 둘이 살아본 적이 없다. 우리가 신혼여행에서 돌아오기도 전에, 홀시아버지는 큰 딸네에서25평 임대아파트인 우리 신혼집으로 짐을 싸서 들어오셨다.
그리고 나는 결혼하자마자 아기가 생겼고, 남편은 아기가 생기자마자 미국으로 6개월짜리 어학연수를 떠났다. 그러니까 나는 결혼하자마자 임신한 몸으로 시아버지와 둘이 살았다. 모든 걸 다 챙겨주던 스타일인 친정 엄마의 보살핌에서 벗어나자마자 홀시아버지와 둘이 사는 임산부가 된 나는 결혼 전처럼 늦잠을 잤고 아침을 굶고 허겁지겁 출근을 했다. 시아버지는 그런 나를 위해 직접 간 토마토 주스를현관문 앞에 들고 서 있다가 꼭한 입 먹여서 보냈다.
그 말을 들은 직장 선배가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시아버지가 며느리가 아니라 막내딸을 데리고사는 거네."
퇴근 후 집에 오면 나는 시아버지가 사놓으신 밑반찬으로 저녁을 대충 때우고 거실 텔레비전을 보다가 시아버지가 들어오시면 꾸벅 인사를 하고 계속 텔레비전을 봤다. 시아버지는 대개 친구분과 저녁을 드시고 오시고 아닐 때도 나에게 그냥 있으라 하고 스스로 저녁을 챙겨 드셨다. 그럼 난 정말 그냥 있었다.
그리고 2년 뒤 내가 조금 철이 들려고 하던 때에 시아버지는 돌아가셨다. 사람들은 장례식장에서 내 등을 두드리며 '네가 고생많았다'라고 하였지만, 난 내가 뭘 고생했는지 잘 몰랐다. 그리고 얼마 뒤 친정엄마가 며느리와의 갈등으로 우리 집에 짐을 싸들고 들어왔다. 그렇게 우리는 또 친정엄마와 살게 되었고, 지금까지 살고 있다. 결국 결혼생활 19년 동안 우리 부부는 항상 어른과 함께 살았다. 신혼 때 남편은 나에게 고마워했고, 지금은 내가 남편이 고맙다. 그렇게 서로 고맙고 둘 만의 시간이 소중하고 애틋하다 보니 지금도시간이 나면연애하듯 둘만의 공간을 찾아 집 앞 커피숖을 간다. 그렇게 둘이 앉아 한참 수다를 떨며알콩달콩 거리다 집으로 온다.
나는 분명 철없는 며느리였다. 시아버지께 살갑게 말을 걸 줄도 몰랐고 항상 돌봄을 받기만 하며 살았기에 누굴 챙길 줄도 몰랐다. 시아버지를 위해 함께 외출하거나 식사를 준비한 기억도 손에 꼽는다. 홀시아버지를 신혼집에서 모시고 산다고 했을 때, 주변에서말은 안 했지만 난감해하는 표정이었다. 그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나를 보며 칭찬을 해야 하나, 말려야 하나 하는 마음으로 말을 이리저리 돌렸다. 나는 좁은 집에서 홀시아버지와 산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며느리가 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그때는 잘 몰랐다. 서른 넘어 결혼하는 나였지만 세상모르는 철부지였다.
어쩌면 그랬기 때문에 큰문제없이 여기까지 왔는지도 모른다. ( 가장 큰 이유는 시아버지가인자한 분이셨고, 함께 산 기간이 짧았기 때문이겠지만.)
요즘은 인터넷, 유튜브, sns 등 미디어가 발달하니 겪어보지 않고도 모든 걸 알 수 있다. 하지만 남녀노소 모두 너무 아는 게 많아지니 미리 모든 상황을 파악해 놓고 자신의 입장에서 손해와 이익을 계산한다. 그때가 지금처럼 인터넷이 발달한 시대였다면 나는 그런 무모하고 위험한 도전(?)을 안 했을지 모른다. 함께 살며 겪게될지도 모를 부담감과 불편함에 대해 몸서리치며 그냥 가까운 곳에 모시고 따로 살자고 하거나, 결혼을 재고했을지도 모른다.
그과정에서 남편, 나, 주변 사람 모두 상처를 입었을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닥치는대로 살다 보니 서로 마음이 가는대로 했고 서툴지만 서로의 진심에 맞닿았다.
물론 결과가 좋았기에 과정도 아름다워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때로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시작하면내 이익과 손해가 선명하게 들어오고 그것을 계산하다 보면 내가 소중히 여기는 게 어느 순간 사라져 버리고 소중한 걸 지키고자 세웠던 계산서만이 덩그러니 내 앞에 남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지켜낸 것이 정말 내가 지키려했던 것인지껍데기뿐인 허상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