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남포동 지하상가에서 추억을 줍다

by 연구하는 실천가

차는 수리를 맡겼고, 남포동에 약속이 있었다. 그래서 오랜만에 버스와 지하철을 갈아타며 시내로 나가게 되었다. 예전에도 지하철을 타고 남포동에 갈 때면 약속 장소가 자갈치역과 남포역 중에 어디가 더 가까운지 항상 헷갈렸었다. 나는 대체로 자갈치역을 택했으므로 이날도 그러했다. 하지만 약속 장소인 롯데백화점은 남포역에서도 훨씬 더 끝 쪽인 10번 출구라는 점에서 잘못된 선택이었다. 하지만 그 선택이 내게 추억의 여행을 선사했다는 점에서 결국은 옳은 선택이 되었다.


위로 올라오니 지하상가가 나타났다.
훅~ 밀려오는 지하상가 특유의 묵직한 냄새.

그리고 그 순간 펼쳐진 풍경에 나의 발걸음은 뛸 듯이 가벼워지고, 마음이 설레기 시작했다.
'뭐지? 이 기분?'

오래전 묵혀놨던 앨범을 여는 기분. 그 앨범을 , 펼쳐지는 익숙하면서 아련한 풍경과 그리운 감정.


20여 년 전 주말마다 돌아다녔던 바로 그곳이었다. 남포동 지하상가.

그 시절 '내 옷을 사기 위해', '친구 옷을 같이 골라주기 위해', '약속 시간이 남아서', '그냥 심심해서'란 이유로 우리는 이 곳을 얼마나 자주 왔던가. 친구와 팔짱을 끼고 길고 긴 이 길을 걸으며 무엇이 그리 즐거워서 웃어댔던 것일까? 그렇게 돌아다니다 누구 한 명이 '저 옷 어때?'하면 그 상점 앞에 서서 온갖 품평을 하다가 가벼운 호주머니를 생각하고 아쉽개 돌아서서 다음 가게 쪽으로 이동하곤 했다.


하지만 지금의 지하상가는 그 시절의 우리 같던 20대들은 보이지 않고 몇몇 할아버지들과 나이 지긋한 아저씨들이 돌기둥처럼 생긴 둥근 의자에 혼자 또는 여럿이 앉아 빈 허공을 무심히 보거나 정치 이야기를 하는지 심각하게 이야기 나누고 있을 뿐, 그때와 같은 활기가 없다. 우리에게 꿈의 보물창고 같았던 값싸고 예쁜 옷이 가득하던 가게들도 거의 사라지고 중년을 겨냥한 듯 알록달록한 옷이 진열된 옷가게와 건강이나 생활관련 물품을 파는 가게들이 들어서 있다.

병아리 같은 우리의 20대가 지나가버린 것처럼 지금의 남포동 지하상가도 세월의 흔적을 간직한 채 늙어버린 것이다. 추억이 이끄는 이 길은 롯데백화점을 가리키는 표지판이 보이면서 끝났다.


하지만 오래된 앨범 같던 우리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그렇게 도착한 롯데백화점 광복점 10층 식당가에서 나는 그때 팔짱 끼고 함께 걸었던 그녀들을 마법처럼 다시 만났고, 오는 동안 내가 떠올렸던 추억 이야기를 그날의 병아리처럼 종알종알 풀어내었고, 그녀들은 그때의 표정 그대로 까르르 웃어 주었다. 우리의 추억 이야기는 그렇게 한동안 끝날 줄을 몰랐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쉰 즈음의 소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