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국화 옆에서]의 재해석
"너는 언제 퇴직할 거니?"
"퇴직하면 뭐 할 건데?"
20대 때는 주로 이성에 대한 이야기, 30대 때는 육아 이야기, 40대 때는 교육 이야기가 우리들의 대화에서 단골 주제였다면 요즘은 퇴직에 대한 이야기를 한 번씩 하게 된다.
그러면 나는 대답한다.
" 농사지으며 글 쓸 거야."
친구들은 뜬금없다는 듯 물어본다.
" 너 농사 지어봤어? "
"아니, 난 화초도 잘 못 키우는 편이야. 그래도 화초 키우는 거랑 농사는 분명 다르지 않겠어? 난 농사 짓는 것과 글쓰기는 비슷한 행위이고 그 둘은 내 삶의 궤적과 맞다는 느낌이 있어."
나의 엉뚱한 대답에 친구들은 알쏭달쏭하다는 표정을 지을 뿐이다.
오늘 동갑이지만 한 해 선배인 친한 선생님이 내게 어떤 질문을 했고, 나는 그 대답으로 '대안학교 교사가 되고 싶다'라고 했다. 그 선생님은 의외로 좋은 생각이라고 맞장구쳐 줬고, 나는 신이 나서 '얼른 학교 세워서 나 좀 데려가라'고 했다.
웃자고 한 소리였지만, 전혀 마음에 없는 소리는 아니었다.
며칠 전 '학교가 마을이다'라는 대안학교 관련 책을 읽으며 조직이라는 틀에 갇힌 교사가 아닌 현장 속에 살아 몸부림치는 교사가 되어 내가 커리큘럼을 온전히 만들고, 다양한 방법으로 내가 꿈꾸던 교육을 실천하고 싶다는 생각을 설핏했던 것 같다.
'농사와 글로 이모작을 짓겠다'는 나의 은퇴 후 바람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좀 더 생산적인 삶으로써 '대안학교 교사'를 슬쩍 생각해 본 것이다. 학교든 회사든 조직은 개인을 옭아매고 자율성을 파괴한다. 열심히 할 수는 있으나 즐기며 할 수가 없다. 그래서 미래의 직업은 소수가 이끄는 창업으로 가야한다고 본다. 그래야 일에 매몰되지 않고 개인의 힘이 살아 있는 일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조직이 개인을 규정하지 않고 개인이 조직을 세우는 일터.
그런 곳이라면 책에만 있는 "자아실현"이라는 직업관이 현실이 되지 않을까?
아마 내가 프로농사꾼이나 작가가 될 가능성은 희박하므로 그저 소일거리로 이 일로써 내 후반기 삶을 규정하기는 왠지 쓸쓸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래서 학교에서 느꼈던 교육의 본질에 대한 목마름을 해소해 주고 누군가의 삶에 조금이나마 영향을 주는 삶을 꿈꾸는 것이다.
한 때는 '은퇴하면 절대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은 하지 않겠다'라고 생각했다.
빡빡하게 돌아가는 커리큘럼과 다양한 상황에서 발생하는 긴장과 책임감, 그 속에 소진되는 나 자신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전과 온전히 다른 새로운 삶을 살고 싶기도 했다. 예를 들면 아늑한 분위기의 커피숖을 열고 싶다는 많은 은퇴자의 로망이 내게도 있었다.
고등학교 때 [국화 옆에서]라는 시를 배우면서, [머나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 인제는 돌아와]라는 구절을 이해하지 못했다. 쉰을 몇 달 앞둔 요즘, 이제 머나먼 젊음의 뒤안길을 막 돌려고 하는 나를 느낀다. 소쩍새처럼, 천둥처럼 울고 소리치며 살았던 뜨거웠던 시간들이 저 멀리 뒷걸음질치는 느낌이다. 그리고 고요한 오솔길에 핀 노란 국화꽃처럼 이제는 생활을 위한 삶에서 조금은 초연한, 나와 우리의 삶 자체에 의미를 두는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기 위해 아직은 수많은 밤에 무서리가 내리고 잠이 오지 않을 만큼의 번뇌의 시간을 좀 더 이겨내야 할 것이다.
아이들과 함께 하다 보면 콩나물 시루에 물을 붓는 것처럼, 부어도 부어도 금방 물이 빠져버리는 모습에 힘이 쑤욱 빠져나가는 순간들을 겪는다. 그래도 아이들은 어느 순간 자고 일어난 후 쑤욱 자란 콩나물을 보듯 성장해 있는 걸 느끼는 순간이 찾아오기에, 오늘도 아이들과의 눈 맞춤과 하이파이브로 하루를 연다. 하지만 어느 날 아이들을 진심으로 대하지 못하는 나 자신을 보거나, 나의 체력이 한계를 느끼는 그날이 오면 조용히 퇴직을 할 것이다.
그리고 젊음의 뒤안길에서 돌아온 어느 날, 나는 어떤 꽃이 되어 있을까? 방울토마토와 상추를 키워 이웃과 나누며, 나의 이야기를 이름 모를 누군가와 공유하며, 가능하다면 세상과 삶에 대한 방향을 함께 고민하는 친구 같은 대안 교사가 되는, 그런 고운 국화꽃 같은 이가 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