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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구하는 실천가 May 05. 2020

 쑥을 사다

사피엔스를 읽으며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라는 책에서 수렵채집인이었던 인류가 농부가 되면서 인의 비극이 시작되었다고 다.  자연의 한 부분으로 먹이사슬의 중간층에서 자유를 누리며 살던 인간이 자연을 조정하는 자로서 농부와 목축인의 삶을 선택하여 먹이사슬의 최상층에 올라서면서 인간 개체로서는 노동과 빈곤의 멍에를 짊어지는 고통의 삶을 살된 것이다.  그렇다면 농부와 같은 생산자의 자리마저 기계에게 내주고 먹이사슬을 조작하는 신적인 단계에 올라서며 오로지 자연의 파괴자이자 소비자로 사는 현대의 사피엔스에게는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까?  일단 올해 우리 삶을 혁명적으로 바꾸어 버린 키워드 바이러스 미래의 전초전 아닐까?

  19세기도 아 21세기에 하찮은 미생물에게 인류의 삶이 이토록 지배당하게 되어버릴 줄 우리는 몇 달 전 결코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자연을 움직이는 신적 존재에 가까워졌다 자부하는 인류는 먼 미래는커녕 일 년 뒤 미래조차 밝게 내다볼 수 있을까?


#1 마지막 채집인의 종말

 나는 작년부터 쑥을 캐지 않는다.  4월이 시작되면 나는 집 앞 공원 풀숲에 쭈그리고 앉아 정성스레 쑥을 다.  그다음 집에 돌아와서 먼지와 지푸라기를 1차 정리하고 물로 서너 번 정성스레 씻는 2차 수고를 하고서야 음식을 만들 준비를 완료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손질된 1500원어치 쑥  봉지를 사는 것이 더 깨끗하고 간편하다 여긴다.

 그렇게 나는 마지막 남은 수렵채집인의 DNA를 지우고 21세기의 문명인으로 완전히 탈바꿈하였다.


#2 여기가 천국

   나는 원래 조리 과정의 위생 문제와 일회용 용기 때문에 배달음식을 싫어하였다. 그래서 집밥 아니면 외식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던 나의 음식 문화 패턴에 요즘 변화가 생겼다.  바로 <배달 앱>을 보는 재미에 푹 빠진 것이다.  예전부터 있던 <배달 앱>지만 항상 시류에 한발 늦는 나는 이제야 <배달 앱>의 스마트함과 편리함에 감탄하고 있다.  우리 동네에 이렇게 다한 배달 음식, 그리고 음식에 대한 각종 정보들이 가득하다니.  더 이상 어떤 음식을 먹을까, 혹시 맛이 없진 않을까를 고민할 필요가 없다. 각종 메뉴 속 음식 사진과 리뷰를 보는 것, 그리고 가게 사장님들의 적극적인 피드백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흐뭇하니, 이제 행복한 선택의 고민만 하면 된다.   한 때 중국음식, 피자, 치킨으로 단조롭던 배달 메뉴에서 이제는 삼겹살까지, 배달이 되지 않는 메뉴란 없다. 그 무엇이든 배달되는 이 신기한 시스템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거실 소파에 앉아서 입맛대로 고른 후 버튼 몇 개만 누르면 된다는 사실에 더 이상 힘들여 음식을 만들고 싶은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매일 삼시 세 끼를 이렇게 앉아서 배달을 시키고 싶은 욕망에 시달린다. 이제 음식은 더 이상 자연의 재료로 인간의 노력이 가미됨을 알 수 없는 완전체로만 보이는 시스템이 만들어 낸 하나의 상품일 뿐이다.

배달 앱에 들어가면 많은 배달 메뉴 뿐 아니라 그 음식에 대한 엄청난 정보가 가득하다


#3. 온라인 수업의 일상화

 아이들을 만나지 않고 온라인 수업을 한 지 넓게 보면 두 달, 좁게 보아도 한 달이다.  처음에는 견딜 수 없는 답답한 수업 방식에 수시로 한숨이 나왔지만 이제는 오히려 아이들을 만나는 게 슬슬 두려워진다. 3월의 설레는 만남 따위는 없이 22명의 아이들과 화상과 전화로 얕고 단편적인 관계를 맺어온 나는 이제 서로 낯설지도, 그렇다고 편안하지도 않은 오묘한 상황에서 아이들과 곧 대면 을 갖게 될 것이다. 그렇게 맞이 대면 수업의 장면이 미래 공상 과학영화의 한 장면처럼 기괴하고 어색하게 상상이 된다.


   우리첫 만남이자 첫 대면 수업은 마스크로 얼굴의 반을 가 채 시작될 것이다.  아침을 열던 하이파이브 인사는 체온검사로 대신할 것이고, 등을 토닥여 주거나 손을 잡아주는 것 대신 일정한 거리에서 눈빛으로 감정을 전달할 것이다.  그렇게 아이들과, 그리고 아이들끼리의 거리 유지를 위해 엄포를 놓으며 이 작은 교실, 이 작은 책걸상에 앉혀놓고 아무런 감정 교류 없이 해야 할 수업이 차라리 부담이 되려 한다. 토의 수업도 협동 학습도, 놀이 학습도, 체육 활동도 안 되는 온라인 같은 대면 수업의 기묘한 장면이 자꾸 상상된다.


 코로나가 앞당겨 버린 본격적인 비대면 미래 사회의 시작.

  나무에 매달려 열매를 따고 커다란 멧돼지를 절벽으로 몰아가며 사냥하던 자연인 가족의 수렵시대에서 이제는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사이버 공간인지,  무엇이 실체이고 무엇이 가상인지, 무엇이 생명이었고 무엇이 공산품인지 무엇이 자연이고 무엇이 인공인지 헷갈리는 글로벌 인류 공동체의 시대가 시작된 지 한 참 전이다. 이러다 무엇이 인간이고 무엇이 사이보그인지 모르는 시대가 되려나.


 하라리는 인류를 발전시킨 것은 인간이 가진 상상의 능력이라고 했다.  종교와 법과 같이 존재하지 않는 것을 인간의 머릿속에서 가상으로 구현하고 그것을 믿고 따름으로써 인류의 번성과 지구 공동체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가축의 번성이 가축 한 개체의 입장에서는 비극이듯이 인류의 번성은 결국 종족의 번성일 뿐 개체는 더욱 불행해지는 방향으로 나아갔다고 그는 말한다. 이제는 인류의 번성을 이끈 상상의 능력이 시공간의 한계를  넘어 아예 인간의 감정마저 시스템에게 내주려 한다. 이제 우리 인류의 번성은 계속될 것인가?  그리고 개체의 불행은 더 심화될 것인가? 그래서 결국은 시스템 혹은 바이러스에게 지구 주인의 자리를 내주게 될 것인가?


   그렇게 곧 다가올 등교 개학으로 마음이 싱숭생숭한 한 사피엔스가  다시 하라리의 [사피엔스]를 계속 읽으며 답을 찾아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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