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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구하는 실천가 Jan 07. 2020

지영씨, 나를 용서하길

 지영 씨에게.

지영 씨.  나는 당신의 이야기를 영화로는 보지 못했고, 오래전에 책으로 읽었어요.  그래서 당신의 이야기가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아 당신의 마음을  이해한다고 자신할 수 없는 점 양해하고 내 이야기를 그저 스쳐 지나가 듯 들어줘요. 내가 갑작스럽게 이런 편지를 쓰는 이유는 며칠 전 지인들과 우연히 당신의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기 때문이에요.  대부분이 50대 전후 워킹맘인 우리는 당신을 어느 정도 이해는 하지만 완전히 공감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의견 일치를 보았답니다. 그렇게 그날 나는 집으로 돌아오며 당신과 우리와의 간격이 어디에서 시작된 것일까 생각해 보았어요.  그래서 두서없이 이 편지를 써보게 되었답니다.  


   생각해보면 82년생인 지영씨의 시대와 70년생인 나의 시대는 조금은 다르고, 조금은 비슷했을 거예요.  여전히 아들 그리고 남자를 중시하는 풍조가 암암리에 사람들의 인식을 지배하고 있었을 테니까요. 그래도 90년대에 들어서면서 대한민국에도 페미니즘이 조금씩 싹트면서 지금은 많은 변화가 느껴져요.  하지만 지영씨가 아기였을 때, 그리고 내가 10대이던 80년대만 해도 '딸은 시집가면 그만'이라는 말을 나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으며 자라났지요.  요즘은 아무도 이렇게 생각하지 않을 거예요.   이렇게 인식은 조금씩 변하고 있었지만, 지금도 여전히 보이지 않는 세상의 유리벽은 더욱 이중의 잣대로 당신에게 상처를 주었을 수도 있을 거예요.


  요즘 유행하는 말에 "라떼"라는 말이 다고 하더라구요.  아마 "나 때는 말이야~" 같이 기성세대가 자신의 시절을 빗대어서 지금 젊은 세대를 가르치려 드는 것을 꼬집는 말인가 봐요.  그렇다면 나도 어쩔 수 없는 '라떼세대'가봐요.

  당신보다 12살이나 나이 먹은 '때' 이야기를 지금 하려고 하니까요.  비록 10년 남짓의 차이지만, 나 때에는 딸이 태어나면 그것은 축복이 아닌 그저 아들이 아닌 자식이 태어난 아쉬움쯤으로 부되었지요.  그래서 아들을 낳기 위해 줄줄이 딸을 낳기도 하던 시절이었답니다.  내가 인문계 고등학교를 가겠다고 하니,  부모님보다 오히려 주변 사람들이 나중에 딸이 대학을 간다고 하면, 남동생은 어떻게 공부시킬 거냐며  난리가 났답니다.  난 그저 가난한 집에 태어난 죄려니 하고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묵묵부답으로 버텨 '독하다'는 소리를 들으며 결국 인문계 고등학교를  진학했습니다.  물론 엄마의 완강한 지지가 있었기에 이런 주변의 오지랖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지영씨도 그러했다지만, 나 또한 길을 걷다가,  또는 복잡한 차 안에서 문득 이상한 눈길과 손길이 느껴지면 화들짝 놀라며 불쾌한 감정을 꾹꾹 누르며 그저 오늘 운이 없다 생각할 뿐,  진 사람처럼 누가 알까 숨기기 바빴지요.  대학 때 페미니즘 관련 책을 읽으며 그 주제로 남자 동기나 선후배들에게 이야기하면 그 당시에 진보적인 생각을 가진 남학생들 더 심한 반박의 말을 하여 남자들에게 실망하기도 했요.   


   지금도 누군가와 젠더 문제를 이야기할 때 나름 페미니즘의 사고를 갖고 있다고 자부하지만 결국 저도 몸의 나이만큼 마음의 나이도 늙나 봅니다.  지영씨에게 100% 공감하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을 보면요.  세대의 간격은 어쩌면 남녀의 입장 차이보다 더 큰 강물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것은 나이의 차이도 있지만 결혼을 하고 아이를 이미 키워낸 경험치의 우월적 관점 때문인 지도 모르겠습니다.  래서 지영씨 남편보다 시어머니를 이해시키는 것이 더 힘든가 봅니다.  어머니의 입장에서 지영씨의 아픔이 그렇게 절실하게 안 느껴지고 당신의 시절보다 많이 편해졌다고 생각할 테니 말입니다.  차라리 내가 아내, 엄마, 며느리로서의 삶을 힘들게 거치지 않고 오로지 딸과 여자로서의 삶만을 살아왔다면 지영씨에게 좀 더 공감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힘겨워하는 지영씨를 한편 이해하면서도 쉽게 공감 못하는 나 자신을 탓하게 되네요. 이런 나를, 지영씨 용서해 주길.  


  "라떼"이야기를 조금 더 할게요. 내가  아기를 키우던 시절,  떨어지려 하지 않는 어린것을 기어이 남의 손에 맡기면서 안 가려 버둥거리는 아기와 함께 몇 개월을 울었지요.  도저히 안돼서 육아휴직을 뒤늦게 신청하니, 아기가 막 돌이 지나서 육아 휴직 기간이 끝났다고 하네요.  그 시절에는 육아 휴직 기간이  돌까지였답니다.  나는 무슨 돈을 그렇게 벌어보겠다고 인큐베이터에서 나온 지 몇 개월 안된 것을 남의 손에 맡겼던 걸까요? 그때는 육아휴직이 좀처럼 흔하지 않던 때라 원래 그런가 보다 하며 살았나 봅니다.  그렇게 때 늦은 후회를 주워 담고 울며 불며 직장을 다니며, 환절기마다 폐렴으로 넘어가는 아이를 안고 응급실에서 밤을 새우는 것이 당연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나도 알아요. 그 시절을 지영씨 세대에 물려주면 안 된다는 것을요.  그건 당연한 게 절대 아니라는 것을요.  그리고 지금의 세월이 그때보다 한 뼘 나아졌다고 워킹맘이 살기에 만만한 시절이 아니라는 것도요.  하지만 이 만큼밖에 나아지지 못한 것을 너무 서러워하지 마세요.  항상 그렇듯이 세상 변해도 관습과 관념의 변화는 더디만 하잖아요.  사는 건지 버티는 것인지 모르던 30를 관통한 한국의 평범한 여자 힘들게 지금의 30대를 보내는 지영 절대적으로 공감 못하는 이유 중에는  아기를 자기 손으로 키울 수 있다는 것에 대한  부러움도 약간은 있습니다.  아기와 둘이 보내는 긴 하루가 얼마나 지치는지,  그 맘이 드는 것이 아기에게 또 얼마나 미안할지, 나 자신이 없어져 가는 그 허무한 시간과 공간이 어떨지 나도 조금은 압니다. 나 또한 방학 동안이지만 소위 말하는 독박 육아를 해 보았습니다. 차도 없고 비탈길 꼭대기 좁은 임대아파트, 바깥은 추위 아니면 무더위로 나갈 엄두를 못 내고 꼼짝없이 손바닥만 한 거실에서 아기만 마주 보고 살았으니까요.  그렇게 아기 밥을 먹이고 남은 찬 밥 긁어먹으며 밤 12시쯤 들어오는 남편만 기다리며 보내던 그 깨알 같던 나날이  오릅니다.  파김치가 되어 들어온 남편은 아기 얼굴 한 번 만지고 잠들어 버리면 끝이었지요.  이렇게 워킹맘으로도, 전업주부로도 아기 엄마는 고단한 시간을 버텨야 함을 아주 조금은 알지요. 그래서 그나마 육아의 어려움을 알아가는 요즘의 사회적 공감대가 조금은 부러워다. 그래서 지영씨의 외침이 조금 작게 나에게 와 닿음을 용서해 주길 바래요.  그래요.  우린 어리석게도 그렇게 살았으므로, 서러움도 모르고 부당함도 삼키고 그렇게 살내었요.

   

 하지만, 지영씨. 나는 여전히 당신의 외침을 응원합니다. 지금은 남자든 여자든 우리 모두 대한민국의 2020년을 살아내느라 너무나 힘들지요.  혼자도 힘이 드는데, 함께 가려니 더 힘이 들구요.  그래서 서로에게 외칠뿐 답은 안 보이네요. 하지만 당신의 삶이 힘든 것이 당신만의 어려움이 아닌 것이 감히 위로가 될는지요.  그래서 우리는 함께 화를 내야 합니다.  '남자나 여자 그리고 모에게'가 아니라 세상과 제도를 향해서 말입니다.


  왜 회사의 경쟁력이라는 이유로 육아 휴직을 당당히 누리지 못하게 하는지, 회사는 어린이집을 의무 설치하지 않는지, 육아 휴직이 승진의 걸림돌이 되어야 하는지, 남자의 육아휴직이 유별난 것이 되어야 하는지,  필요에 따라 자녀 돌봄 시간이 보장되지 않는지 우리는 따져 물어야 합니다.  

  

  저출산 문제를 이야기 함에 있어서, 더 이상 여자들을 출산의 수단이나 육아의 담당자로 바라보지 말고 꿈을 가진 개인이며 사회인으로 마주 보고 그들이 결혼하고 아기를 낳고 키우는 일이 그들의 삶을 무너뜨리는 두려움이 되지 않도록  주어야 합니다.  단지 육아를 위한 적 지원을 늘이는 것으로 사회가 할 일 다 했다고 하는 것은 아랫돌을 빼서 윗돌을 괴는 어리석음에 불과함을 알게 해야 합니다.  


  그러니 지영씨. 힘을 내시고 당당히 외쳐 봅시다.  부부가 함께 아기를 키울 수 있는 환경을 달라고. 퇴근 시간이 어린이집 마치는 시간보다 늦지 않게 해 달라고.  아이가 아플 때 눈치 보지 않고 휴가를 쓸 수 있도록 해 달라고 말입니다.  노동시간을 길게 하는 것이 더 이상 회사의 경쟁력이 아닌 시대라는 것을요.


  그래서 당신이 정말 행복하길 바라봅니다. 이 글마저 당신을 이해 못하는 누군가의 돌팔매가 될까 겁이 나지만, 지영씨도 지영씨의 가족들도 모두 행복하길 바라봅니다. 그리고 미래에는 우리 아이들도 좀 더 나은 세상 속에서 삶을 견디지 않고 살아가길 꿈꿔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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