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연구하는 실천가 Jun 01. 2022

교육의 딜레마



   우리나라에서 교육은, 정확히 말하면 입시는 전 국민의 최대 관심사이자 최대 골칫거리이다.  이전 입시를 치른 대다수 기성세대들과 현재 입시를 당면하고 있는 10대 청소년과 그의 부모들, 그리고 그 입시를 통과한 대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대학교수들과 그 입시에 곧 놓일 학생을 바라보는 교육현장의 교사들 모두가 교육의 문제를 누구보다 고민하며 교육의 본질을 되찾고 학생들의 삶이 팍팍하지 않기를 열망한다. 반면 내 아이만큼은 이 입시제도를 잘 치러내기를 바라며 고군분투한다. 여기서 일차 딜레마가 발생한다.


  나 또한 내가 겪은 입시지옥을 30여 년 뒤 나의 자식이 똑같이 또는 더 심하게 겪게 되리라는 것을 예상하지 못했다. 뭔가 막연하게 나의 자식이 대학을 가는 시대쯤에는 뭔가 합리적인 방향성이 있는 시스템으로 변화한 교육 제도가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나의 그 시절에는 모든 게 권위적이고 일방통행이고 전체주의적이었으므로 교육만 유난스럽게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모든 제도가 수십 년을 거쳐 그 절차와 방법이 개별화, 다양화, 효율화되어 발전하고 있는데 유독 교육은 암기와 문제풀이, 5지선답의 미로에서 무엇이 목적이고 수단인지를 알지 못하게 채 그 시대에서 몇 걸음 채 나아가지 못한 느낌이니 모두가 교육에게 손가락질하느라 바쁘다.


  독재 정권에서 민주주의를 찾아온 진보 세력은 이전의 정치, 경제, 사회의 구태의연하고 비민주적인 시스템을 민주적이고 합리적인 시스템으로 개혁하였다. 아울러 교육도 그러한 개혁의 방향으로 접근하였다. 하지만, 그러한 개혁으로 이루어 낸 정성 평가와 여러 줄 세우기는 지금 무늬만 남은 채 문제점을 잔뜩 안고 무너져 내리고 있다.

  인간의 가능성은 정량적인 평가로 매겨질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교육의 방법과 평가도 정량적인 방법으로는 매길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교육 선진국이라는 곳에서 시행되고 있는 정성적 평가 제도를 가져와 우리나라에 이식하였지만, 기득권과 부유층의 편법 입시 비리 등 여러 부작용으로 사실상 신뢰를 잃고 있다. 이전의 일제식 평가는 학생들을 입시 지옥으로 몰고 갔지만 신뢰의 문제가 크지는 않았다. 이것이 두번째 딜레마이다.


  딜레마의 근본 원인은 교육이 신뢰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뢰가 없는 우리 사회에서 교육은 오로지 줄 세우기만이 정답이라는 딜레마가 생긴다. 교육을 믿을 수 없으면 정성적 평가를 이룰 수 없다. 학생의 가능성, 교사의 교육관, 정부의 교육철학, 사회의 다양성에 대한 합의와 믿음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평가가 객관적으로 납득할 수 있는 수량적 기준이란 게 없을지라도 받아들일 수 있는 교육에 대한 권위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교육을 믿고 가기엔 불안함의 요소가 너무 많다.  그 중심에는 너 나할 것 없는 내 자식 중심주의의 명문대 열풍과 블랙홀 같은 거대한 사교육 시장이 있어서 모든 것이 이 안에서는 왜곡되고 변질될 수밖에 없다.

  

 과거 열린 교육이 들어왔던 시절, 교육 현장은 몇몇 교육혁신을 주도하는 사람들에 의해 엄청난 바람이 불었다. 그 시절 신규 발령을 받은 나는 내가 꿈꿔왔던 교육과 비슷한 그것에 열광했으나, 당시 대부분의 교사들은 그 바람에 냉소를 보냈다. 나 또한 그들만큼 또는 그 이상의 나이가 되어버린 지금, 교육 현장의 교사들에게 아무런 공감 없이 갑자기 밀고 들어오는 연수와 뜬금없는 시스템에 영혼 없는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교육학자들이나 정치가들, 그리고 뭔가 좋아 보이는 새로운 수업 형태로 실적을 쌓으려는 일부 교사들의 주도로 이루어지는 강제 이식 형태의 교육 제도가 현장에 막무가내로 들어오면 교사들은 처음에는 눈을 반짝이며 연수와 컨설팅을 받으며 몰입하고 현장에 적용한다. 그렇게 협동학습, 질문 수업, it교육 등이 맥락 없이 들어와서 사라져 갔다. 결국 현실의 벽과 형식적인 성과에 지쳐 버린 교사는 얻은 것보다 잃는 게 많음을 느끼며 이내 자신의 수업 방법으로 돌아갈 뿐이다.


 교육은 사람의 문제이고 신뢰의 문제이다. 믿을 수 없으면 변할 수 없다. 일제고사 식 평가와 입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단 멋진 슬로건으로 입시를 바꾸어 놓고 교사와 수업은 거기에 맞추어야 한다. 교사도 이제 교육을 믿지 못한다. 교육 수장이 바뀌어도 기대가 안 되고, 새로운 입시, 교육 이론이 나와도 믿음이 안 간다. 결국 교사는 힘에 부쳐서 형식적으로 흐른다. 서구 선진국은 시스템이 갖추어져 교사의 업무를 충분히 덜어주고 사교육이라는 변수가 거의 없기 때문에, 그리고 대학입시에 올인하는 가정이 소수이기 때문에 왜곡 없이 굴러가는 게 어느 정도 가능했다.   신뢰가 없을 수밖에 없다. 믿고 따라봐도 오히려 손해라는 생각이 든다.  교사는 학생 개개인을 하나하나 돌아볼 여유가 있고, 학생들은 자기의 소질을 계발할 수 있는 사회적 합의와 시스템이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 또 굳이 명문대가 아니라도 자신이 노력한다면 폄훼당하지 않고 진로로 나갈 수 있는 여러 개의 가능성이 있어야 한다. 이 속에서 교사나 학교, 사회에 대한 공정성과 신뢰가 생겨난다. 하지만 우리의 교육 현실은 교사에게 이 모든 무게의 짐을 짊어지라고 한다. 그리고 여론은 현재의 제도가 잘못되었으니 다시 수능 중심의 시대로 돌아가야 한다고 한다. 수능 중심의 시대가 되면 우리는 공정하다고 느끼고 교육에 대한 신뢰가 생기게 될까? 여전히 교사는 사교육의 변수 아래에서 각양각색의 아이들의 성적을 올리기 위해 교육을 고민하기보다 문제 맞히기 비법 전수를 연구해야 하고, 공교육에서도 사교육에서도 원하는 결과를 찾지 못하는 학생들은 자신과 자신의 상황에 대한 무능함으로 치를 떨어야겠지. 다만 공정했으므로 조용하게.

매거진의 이전글 나는 시끄러운 게 좋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