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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구하는 실천가 Aug 04. 2023

이상한 소비자

나는 이상한 소비자다. 그러니까 물건의 품질과 가격에 앞서 다른 점에 소소히 신경이 쓰이는 소비자다. 그래서 경제 원리면에서 합리적인 소비자와는 거리가 멀다.

예를 들어, 가방을 사야 한다면 다음의 조건을 따라야 한다. 적절한 가격과 괜찮은 디자인에 앞서 동물의 가죽이 아니어야 한다.

그러다 보니, 내가 원하는 예쁜 가방을 사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종종 있다.

그렇다고 내가 채식주의자는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채식주의자가 되고 싶은 잡식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가족들이 돈가스 전문점에서 돈가스를 시킬 때, 나는 생선가스나 메밀국수를 시킨다. 고기를 절제해야겠다는 나름의 의지 표명이다. 하지만 입 짧은 남편이 종종 다수의 돈가스 조각을 남기는 것이 문제이다. 육식을 꾹 참고 있던 나는 음식이 남으면 안 된다는 속 보이는 정당화의 논리로 내가 더 많이 돈가스를 먹는다는 게 함정이다. (사실 샐러드였으면 그렇게 열심히 먹지 않았을 것이다. )


여름이 되어 작년에 신던 여름 샌들을 신어보니 바닥이 들떠 있다. 지난여름, 샌들을 신고 계곡 물속을 들락거리는 등 신발은 다년간 세월의 무게 속에서 풍화되고 있었다. 이걸 그대로 신고 나갔다가는  신발 밑창이 분리되는 난감한 상황이 생길 것만 같다. 하지만 세상에 또 하나의 쓰레기를 내놓지 않으려면 신발 수선집에 가서 샌들을 수선해야 한다. 하지만 이런 낡은 샌들을 수선해 달라고 말하기에는 낯이 좀 부끄럽고, 비용이 저렴한 새 샌들을 사는 것 대비 가격 차이가 별로 없을 듯하다. 내가 정말 좋아했던 샌들이긴 하지만 이건 너무 비효율적인 선택이 아닌가? 며칠을 고민 끝에 값싼 새 샌들을 샀고, 헌 샌들은 집 앞에 나갈 때 신는 슬리퍼 용도가 되었다.


몇 달 전부터 어글리 박스라는 랜덤형 채소 박스를 인터넷에서 2주 간격으로 주문하고 있다. 비건이 되기에는 고기를 너무 좋아하고, 고기를 먹기에는 나의 위와 마음이 편하지 않다. 그래서 어글리 박스로 오는 채소들, 그리고 함께 오는 레시피를 보고 반강제 집밥을 만들어 먹고 있다. 덕분에 내가 요리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휴대폰 계약을 할 때 2년 사용 후 새 휴대폰으로 바꾸어주는 약정으로 혜택을 주겠다는 휴대폰 매장 직원의 설명에 나는 그런 약정은 필요 없다고 말한다. 나는 최대한 이 휴대폰을 오래 쓰기를 원한다고 했다. 그러면 직원은 당황해하며 오히려 중간에 바꾸어주는 이 약정이 훨씬 유리하다고 말하지만, 나는 괜찮다고 말한다. 그런 식으로 쌓여가는 세상 쓰레기에 내가 한 개 더 얹고 싶은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직장에서 사용하는 2년 이상 된 머그컵에 물 때가 제법 끼어있다. 이럴 때 카페 매장에 진열되어 있는 예쁜 새 머그컵이나 텀블러를 보면 내 마음이 살짝 흔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집에는 사은품으로 들어온 머그컵이나 텀블러가 두어 개 있다. 일단 집에 있는 걸 먼저 써야 한다. 집에 있는 것을 두고 새것을 사려는 마음이 들지는 않는다.

 

나의 이상한 소비가 여기까지라면 나는 나름 환경주의자이며 가치 소비자로서의 우아함을 견지한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고상한 사람은 아닌 듯하다. 한발 더 나아가 명품 또는 사치재에 대한 미묘한 반항심으로 이어진다. 마치 과거에 나이키와 같이 브랜드 운동화가 높은 가격으로 유행할 때 일부 대학생들이 고무신에 나이키 로고 문양을 그려 신고 다니듯이 말이다.


주변 선생님들이 우스개 소리로 말한다. 해운대나 강남에 있는 학교에 근무할 때 차림새가 후줄근하면 학부모들이나 학생들에게 무시를 당한다고. 나는 그런 말을 들으면 왠지 그런 곳에 근무해 보고 싶다. 그래서 '선생님 가방은 어디 거예요? 얼마짜리예요?' 하면, "어, 이거? 인터넷 할인 매장에서 산 거야. 만팔천 원."하고 씩 웃어주고 싶다. 이 무슨 매조히스트적인 감정일까?

나는 몇몇 유명 브랜드를 제외하면 명품 브랜드의 이름도 모른다. 그래서 누군가가 저 가방이, 저 옷이 명품이라고 알려주면 전혀 알아보지 못한 나 자신이 뿌듯하다. '그렇게 비싸 보이지 않는데 저게 명품이었군. 어떡하나. 내가 몰라봐줘서 ‘ 하는 마음이다.  그리고 ’ 나는 이런 가방을 들고 다녀도 좋은데 어떡하지? ’하는 삐딱한 마음이라고나 할까.


부유층들과 함께 한 자리에서 그들이 명품 가방을 의자가 하나씩 올려놓을 때, 내 만팔천 원짜리 가방을 그 옆에 조심스럽게 올려보고 싶은 변태적 쾌감을 상상하는 엇나감의 소비자이다. 물론 내가 그들과 한 자리에 있을 가능성은 1% 이하이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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