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를 만나러 주 1~2회 요양원을 간다. 집에 계실 때는 항상 격한 감정을 드러내던 엄마가 여기 계시면서 많이 순해진 모습을 보면서 다시 집으로 모셔볼까 하는 마음이 살짝 들기도 하지만 24시간 케어를 감당할 생각을 하면 이미 자유의 달콤함을 맛보아버린 나의 이성이 흔쾌히 허락하지 않는다. 사실 불가능하다. 나의 노력만으로 요양원의 돌봄이 해 주는 이 균질의 서비스(식사, 간식, 목욕, 대소변, 건강관리, 말상대, 잠자리 살피기 등을 규칙적이고 동일한 형태로 해내는 것). 비록 너무 시스템화되어서 인간의 냄새를 맡기가 어렵다는 서글픔은 있지만 그러한 시스템이 만들어 주는 돌봄의 기계성이 오히려 엄마를 안정되게 해주는 것인지 모른다고 나는 감히 생각해 본다.(노모를 요양원에 맡긴 못난 딸의 변명이기도 하다.)
'낳아만 주신다면 국가에서 키우겠습니다.'
이 슬로건이 교육 현장에 큰 파도가 되어 덮치고 있다. 학교는 이제 아침부터 밤까지, 아이들을 돌보는 공간으로 바뀌려 한다. 몇 년 전 방과 후 교실, 돌봄 교실이 들어오면서 학교라는 교육 기관에 돌봄이 세 들어 사는 형태가 되었지만, 이제는 돌봄이 확대되면서 학교는 돌봄의 공간이 되었고 그 가운데 잠시 교육이 머물러 있는 형국이 되려 한다. (적어도 초등학교 기준에서)
학부모들도 더 이상 학교를 학업을 의미하는 교육의 장으로만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학업은 사교육이 담당한다고 느끼는 모양새이다. 사실, 교육은 학업만이 아닌, 사회성과 인성을 키우는 장으로 전인교육을 지향한다. 하지만 지금은 더 나아가 돌봄이라는 이름으로 보육을 해 주는 장이 되고 있다.
교사들은 난감하다. 교육자의 꿈을 가지고 대학을 들어갔고, 그곳에서 많은 교수법을 공부하였으나 정작 돌봄의 전문성은 없다. 학교에서는 보육적인 요소가 동반된 돌봄 업무가 교사에게까지 확대되고 있다. 정부에서는 부족한 예산 및 준비 부족의 문제를 일단 교사가 감당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려 하는 것이다. 학부모 또한 본인들이 감당해야 하는 가정교육의 몫까지도 교사에게 원하며, 교육자로서의 전문성보다 돌봄의 마음으로 접근하기를 기대한다.
과거 가족끼리(정확히는 여성 가족이) 당연시되며 무료 봉사로 치부되던 것이 돌봄 노동이었다. 집안일, 육아, 간병, 노인 돌봄까지, 모든 것이 당연하게 가정에서 사랑과 희생의 이름으로 누군가가 이루어내던 일들을 지금은 사회에 요구하면서 가정과 학교는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고 있다. 하지만 시대 변화와 달리 돌봄의 역할과 가치는 과거 희생과 사랑의 무료봉사 때에서 몇 발짝 나아가지 못했다. 여전히 당연하게 요구되는 사랑과 희생정신, 낮게 책정된 임금 가치와 대우 문제, 전문적 역할 분담과 책임 한계에 대한 법적, 사회적 제도 미흡 및 인식 개선 문제는 결국 돌봄의 질을 악화시키고 있다.
또 과거에는 가정에서 이루어지던 돌봄이 사회 기관으로 바뀌면서 가족 간의 유대는 더욱 약화되고 있다. 연로한 노인들은 차치하고, 우리의 미래를 책임질 아이들의 허한 마음은 교육 돌봄의 강화만으로 채울 수 있을까? 부모와의 교감, 소통, 애정이 기반되지 않으면서 아이들의 애정과 욕구불만은 점차 교육 현장을, 나아가 사회를 황폐화시킨다. 이제 돌봄이 그 무엇보다 중요한 노동의 가치로 환산되어야 하며, 그 어떤 일보다 사회의 중요한 수레바퀴로서의 가치를 인식해야 한다. 그만큼 돌봄의 가치에 대한 인식과 지원이 강화될 때, 우리의 미래인 노년과 우리 사회의 미래인 아이들은 행복하고 따뜻한 삶을 살아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