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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 싸움의 고수가 되는 4단계

by 연구하는 실천가

아들은 어릴 때 유난히 작고 여렸다. 남편은 아들이 학교에 들어가면 거친 남자애들 사이에서 맞고 다닐까 걱정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어떤 애가 너를 심하게 괴롭히거나 때리면 확실한 한 방을 날려 기선을 제압해야 해."

내가 보기에 남편의 한 방 이론이 딱히 실제 상황에 맞을 것 같지도 않고 비교육적이어서 그러지마라고 말렸으나, 남편은 남자들의 세계는 한 방이 중요하다는 논리를 계속 내세웠다. 아들은 학교에 들어갈 자신의 앞날이 정말 걱정되는지 사뭇 비장한 눈빛으로 고사리 같은 주먹을 휙휙 휘둘러 보곤 했다. 거친 남자 애들도 상대가 돼야 싸움을 거는 것인지 아들은 한 번도 누구와 싸우는 일 없이 지금까지 자라주었기 때문에 남편이 말한 한 방의 기술이 효과적인지는 결국 증명되지 못했다. 아이들의 세계뿐 아니라 어른들의 세계도 몸싸움은 아니지만 미묘한 심리 싸움의 기술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싸움의 '싸'자도 모르는 내가 갑자기 이런 싸움 이야기를 게 된 것은 순전히 지난 토요일 막내 시누이의 갑작스러운 방문에서 비롯되었다. 막내 시누이는 호랑이 같은 세 언니과 여우 같은 남동생(남편)사이에서 많은 싸움의 경험을 가졌으리라 예상되고, 내가 결혼한 후에도 그 싸움의 일부를 목격하였다. 그런데 막내 시누이는 그와 같은 환경에서 자라면 싸움의 도가 트일 것도 같은데 그쪽으로는 영 소질이 없는지 항상 밀리는 모습을 보였다. 하여튼 막내 시누이는 오자마자 나에게 동서가 없는 게 행운이라며 몇 번을 강조하고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야기인즉슨, 낮에 자신의 시댁 쪽 결혼식이 있어 갔는데 평소 제사 때도 오지 않는 본인의 손윗동서가 와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 손윗동서의 나이는 자신보다 한 살 어리지만 그래도 손윗동서라 자신이 형님이라 불러 주는데, 그 손윗동서는 자신을 자네라고 부른 적이 있어서 평소에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동서와 딸이 결혼식장에 와서 자신을 보고 아는 체를 하지 않아서 자신도 아는 체를 하지 않고 기분 나빠하며 있었는데 결혼식 후 뷔페식당에서 그 딸과 마주치자 시누이는 정색을 하고 왜 인사를 하지 않느냐고 나무라듯 말하고 막 식사를 하려던 참이었다고 한다. 그때 동서가 자신의 딸을 앞세우고 갑자기 나타나서 말하길, '내 딸이 인사를 했다는데 왜 인사를 안 했다고 난리냐'고 여러 사람들 앞에서 화를 낸 뒤 '어른이 어른다워야 어른 대접을 하지' 등의 말을 구시렁거리며 가버렸다고 한다. 그러면서 시누이는 이에 대해 나에게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어보는 것이었다.


나는 원래 남에게 조언을 잘 못하는 성격이라 이런 상황에 오지랖이 넓은 남편이 옆에 없는 것이 잠깐 원망스러웠지만, 내 나름의 생각을 말했다. '그 동서가 기분이 나쁘면 따로 불러서 이야기할 것이지, 왜 사람들 많은 데서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정말 예의가 없다. 원래 자기 자식에게 뭐라 하면 사람들은 이성을 잃는 경우가 있는 것 같다.' 뭐 이런 식으로.


시누이가 돌아간 후 나는 생각했다. 나라면 어떻게 할까?

나를 보았을 텐데도 상대가 못 본 척하고 있다면. 내가 먼저 가서 아는 체 하기 싫다면. 그리고 그냥 있자니 괘씸하고 화가 난다면?

나라면 이런 심리 싸움을 아예 시작하지 않지만 그래도 해야 한다면 이렇게 했을 것이다.
뷔페에서 음식을 담으면서 자연스럽게 조카에게 접근한다. 그리고 쳐다본다. 인사를 하면 받고 '어, 왔니?'하고 지나가면 끝. 조카딸이 그냥 지나친다면, 웃으면서 말을 건다. " 어머, 00야, 너도 왔구나. 오랜만이다. 근데, 얘! 사람을 보면 좀 인사를 해라. 눈이 나쁘니? 그냥 지나칠 뻔했잖아. 알았지? " 정도.

뭐, 그러면 내가 형님이라 불러야 되는 만나고 싶지 않은 동서가 찾아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망신 줄 명분은 주지 않으면서 나는 하고픈 말은 속시원히 할 수 있을 터이다. 가능하다면 가벼운 미소를 띤 채 말이다.


심리 싸움 초급 단계 : 감정에 사로잡히지 마라.

조건: 모든 싸움의 기본, 전면전을 하면 손해 보는 관계일 때, 싸움 초보라면 일단 이 단계를 써라.
방법: 일단 예의를 갖추고 표정은 부드럽게, 할 말은 확실히 하라. 그럼 적어도 내 속은 시원하다.
승률: 80% 이상
실패 가능성: 비꼬는 말투로 오해받거나 사소한 실수로 말꼬리를 잡힐 경우

1. 부탁할 때 나를 누님이라 부르며 친한 척하는 그.

그는 직장에서 항상 사람 좋은 미소로 연배가 높은 여성들에게 누님이라 부르는 등 친화력이 뛰어나 그 누님들로부터 사랑을 독차지한다. 나는 처음에는 그런 호칭이 적응되지 않았지만 그 넉살과 사교성에 넘어갔고, 그와 친밀하다고 느꼈다. 그는 일이 많아 바쁠 때 출장을 가끔 나에게 부탁하였는데, 나는 친밀한 누님으로서 기꺼이 그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나 또한 피곤한 몸을 이끌고 바쁜 업무를 제쳐두고 말이다. 그러다 한 번은 내가 그에게 지나가는 말로 어떤 일을 부탁하였는데, (나는 그가 흔쾌히 들어줄 줄 알았다.) 그는 명확히 말하지 않고 넘어가 버려서 나는 그에게 말 못 할 섭섭함이 생겼다. (명확히 부탁하지 않은 나의 잘못도 있다. 그래서 섭섭하다고 따지기도 애매했다. ) 그리고 얼마 뒤 그는 출장을 또 부탁했고, 나는 순간 딱딱한 표정으로 바쁘다고 거절했다. 그는 잠시 당황했고 동안 어색한 기류가 우리 사이에 흘렀다. 아마 그는 영문을 몰랐을 것이다. 내가 갑자기 그런 투로 대답했으니. 나는 결국 마음도 못 풀고 관계만 어색해졌다. 내가 섭섭했을 당시에 그에게 마음을 털어놓고 오해를 풀었다면 더 편안하고 친한 관계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물론 지금은 그럭저럭 지내며 얼마 전 그의 출장 부탁을 또 들어주었지만 예전처럼 흔쾌히 그의 부탁을 들어주지는 않게 되었다.


심리 싸움 중급 단계 : 싸움은 타이밍이다. 그 자리에서 풀어라.

조건; 오해로 빚어진 사소한 갈등, 친한 관계의 동료일 때
방법: 가능하면 즉시, 또는 자연스러운 순간을 잘 잡아 이야기가 시작되어야 한다. 지나고 나면 말하기 어렵고 말해도 찜찜해진다.
승률: 70% 이상
실패 가능성: 내가 알고 있는 오해 이외의 상황이 숨어 있을 때, 상대방이 나에게 호의적이지 않을 때



2. 중학교 때 얼떨결에 맞짱 떴던 우리 반 짱. 그녀

나는 중학교 때 존재감 없는 아이였다. 그날도 쉬는 시간 책상에 엎드려 쏟아지는 잠을 대강 마무리하고 고개를 드는데, 내 눈앞에 파란색 츄리닝을 입은 커다란 엉덩이가 보이는 게 아닌가?

"왜 내 책상에 허락 없이 앉는데?" 잠이 덜 깬 나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이런 내용으로 제법 앙칼지게 말했다.

순간 여러 시선이 나에게 집중됨을 느꼈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파란색 츄리닝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우리 반에서 인기도 가장 많고 공부도 잘하고 얼굴도 예쁜, 그러니까 우리 반 아이들이 가장 친해지고 싶어 하는 인기순위 1위의 그녀였다. 순간 그녀도 나도 당황했다.

나의 벙벙한 얼굴에 그녀는 " 아, 미안해." 하며 얼른 일어났다. 나의 짜증 섞인 말을 저렇게 따뜻한 목소리로 받아주다니. 그녀가 고맙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 후 그녀는 행동을 좀 더 조심하는 모습을 보였다.

원효대사의 해골물처럼 실체도 모르고 잠꼬대처럼 내지른 말에서 얻은 깨달음이지만, 짧고 굵게 내지른 한 마디가 상대에게 강렬할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 남편이 말한 한 방의 이론과 유사하며 깔끔하게 찌르고 빠져야 한다.


심리 싸움 고급 단계: 싸워야 한다면 분명하고 당당한 한마디로 짧고 굵게.

조건: 나의 잘못이 상대방의 잘못보다 절대적으로 작거나 없어야 한다. 상대가 강하나 판단력은 있을 때.
방법: 내가 당당하다면 상대의 눈치를 보지 말고 용기 있게 똑 부러지게 말하라. 자주 쓰면 안 되고 감정이 들어가면 반격을 받을 수 있으니 감정에 사로잡히지 말고 의연하게 대하라.
승률: 60% 이상
실패 가능성: 상대가 무대포일 때, 그동안 쌓여온 서로 간의 감정의 앙금이 있을 경우.


3. 중학교 때 덩치 크고 성격이 무뚝뚝했던 그녀.

여학생치곤 큰 덩치와 무뚝뚝하게 툭툭 말하는 성격에 나뿐 아니라 다른 아이들도 쉽게 다가가지 못했던 아이로 기억한다. 그런 그녀가 나와 한 조가 되어 학교 본관 현관 청소를 맡게 되었다. 함께 청소를 한 첫날 그녀는 " 빗자루와 쓰레받기 네가 갖다 놔."라고 얄밉게 말했다. (내가 만만해 보였을 것이다.) 나는 속이 꼬였지만, 무슨 대인배의 기운이 갑자기 내렸는지, 진심 해맑은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응, 알겠어. 내가 치울게. 넌 얼른 가봐."

그녀는 왠지 뒤통수를 맞은 듯한 표정으로 나를 멍하니 보더니 우물쭈물하다가 갔다. 다음날부터 그녀는 갑자기 나에게 유독 친절하게 대하며 부드러운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열심히 같이 청소를 하는 것이다. 그 순간, 나는 묘한 뿌듯함이 느껴졌다. 내가 그녀를 정신적으로 승리한 듯한. 지금 생각해보면, 그녀는 자신을 아무도 좋아하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많이 외로웠던 것 다. 그래서 더욱 사람들에게 퉁명스럽게 대하며 자신을 방어하려 했고, 아이들은 그녀를 더 멀리 대했던 것이다. 그런 그녀에게 나는 비록 얼떨결이지만 친절하게 대하였고 그녀는 내가 자신을 친구로 받아들여줬다고 생각한 같다.

싸움의 고수 단계: 상대방이 예상치 못한 반응으로 감동시켜라.

조건: 상대가 나보다 약한 존재일 때, 상대방을 나의 편으로 만들고 싶을 때.
방법: 마음을 열고 그의 눈을 바라보라. 그리고 그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어라. 그러면, 상대방은 적이 아니라 나의 가장 강력한 친구가 될 것이다.
승률: 95%
실패 가능성: 그가 아주 나쁜 인간이거나, 나를 정말 싫어할 때

아무리 좋은 사람들끼리도 서로에 대해 오해의 감정이 생길 때가 있다. 상대를 변화시키는 것은 강한 이나 뛰어난 말솜씨보다 따뜻하고 진실한 마음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마음이 내키지 않는데, 의식적으로 하다보면 진심이 느껴지지 않아 상대도 설득시키지 못하고, 나도 마음을 풀지 못한다. 그럴 땐 차라리 웃는 얼굴로라도 내 속을 툭 털어 놓자. 웃는 얼굴에 침 못 뱉을 것이니 일단 내 마음이 조금 풀리지 않겠는가? 그와의 관계가 틀어지길 원하지 않는다면 적절한 타이밍을 놓치지 않는 정도의 섬세함은 평소에 길러놓자. 그리고 정말 아닌 일에 대해서는 용기내어 단호하게 단, 감정은 절제하고 표현은 거칠지 않게 말할 수 있도록 하자. 결국 우리는 그와 관계가 개선되고, 주위 상황의 문제를 개선하기 위하여 용기를 내어 싸우는 것이다. 그렇다면 잊지 말자. 싸움의 마무리는 진심을 전달하는 것이다. 그에게 화가 난 게 아니라, 그를 둘러싼 상황이나 그의 실수에 화가 난 것이라면. 그래서 결국 피하지 않고 싸워야 한다면, 그와 한 발 더 나아가는 관계가 되는 그런 싸움을 해야 하고 그래야 진정한 승리자가 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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