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 끝나고 얼마 후, 집에서 쉬고 있는데 휴대폰으로 체크카드 결제 내역이 뜬다. 그것도 연달아 4번이나. 아니 내 카드는 집에 있는데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카드사에 전화를 걸었다.
"제 카드를 누가 쓰고 있는 것 같아요."
"잠시만요. 확인해보겠습니다. 혹시 자카르타에 있진 않으신지요?"
"네? 아니요. 저는 지금 한국이고요. 자카르타는 가본 적도 없어요."
누군가 내카드를 도용한 것이다. 난생처음 겪어보는 일에 난 무척 당황했지만 잃어버린 돈을 찾기 위해 절차를 밟기 시작했다. 사실 이런경우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한국에 오자마자 체크카드 안에 십여만원만 남긴 채 돈을 거의 다 빼두었다.(카드도 아예 교체했어야 했는데 게으름에 미뤄두고만 있었다.) 그런데 이게 모두 다 결제가 돼버린 것이다. 그것도 자카르타에서. 나중에 확인을 하니 그 전에도 여러 번 카드를 긁었었는데 큰 금액을 입력했었는지 잔액부족으로 실행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번에는 적은 금액으로 여러 번 모두 빼갔다.
순간 너무 화가 났지만 유럽 여행 어느 지점에서 카드정보가 새어나갔는지 검색하기 시작했다.카드를 총 3개 들고 갔었는데 신용카드로는 비행기 티켓이나 기차표 예약 정도만 하고, 체크카드 1은현금 인출을 할 때만 사용했다.도용당한 체크카드 2로는 현금이 부족할 때 카드 결제를했었는데 실제 나는 이 카드를 자주 쓰지는 않았다.
이리저리 확인을 해보고, 기억을 더듬어 보니 최종적으로이탈리아 로마 피자집이 약간 의심스러웠다.하필 이곳에서 도용당한 카드를 결제했었는데, 그때 종업원이 내 카드를 들고 커튼 뒤로 간거하며 결제하는 동안 여러 명의 종업원들이 내 주위를 둘러싸고 이런저런 말을 시킨 것, 친히 문밖까지 나와 배웅한 모든 것들이 정황상 그곳에서 내 카드를 복사한 것 같은 직감이 들었다. 그 집 피자도 내 선택의 잘못인지 너무 맛이 없었는데 카드까지 도용당했다 생각하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추측일 뿐이고, 그때 내게 보인 종업원들의 호의가 나의 눈을 돌리기 위함이 아닌 순수한 친절함이었을 수도 있다. 지금 와서 그런 걸 따진들 무슨 소용이겠냐만은 은행이 가입한 보험사로부터 돈을 받기까지 받은 스트레스를 생각하면 그 원인을 따져보지 않을 수 없다. 나는 그 이후 3개 카드 모두를 다른 걸로 발급받았고, 해외 결제를 다 막아놓았다. 이제는 시간이 많이 지나 그때의 분함도 다 없어졌지만 로마에서 먹었던 짜디짠 피자의 추억이 떠오를 때면 자연스레 따라오는 기억이 되어 버렸다.
오전 6시. 휴대폰 진동소리에 잠이 깼다. 오늘은 로마 시내 워킹투어가 있는 날이다. 어제 생각보다 꽉 찬 일정에 피곤했는지 오늘은 좀 여유 있는 투어가 되길 바라고 바라며 일어났다. 오늘 아침 메뉴는 삼계탕. 1인 1 닭이다. 사장님께서 로마에서 진행되는 투어는 생각보다 힘들어서 든든히 먹어야 한다며 준비해주신다. 그 마음이 감사해서 한 그릇을 뚝딱 비운 다음 길을 나섰다.
오늘 집합장소는 콜로세움이다. 로마에 온 첫날 야경투어로 봤던 콜로세움. 그 감동이 아직도 생생해 찾아가는 길이 한없이 즐겁다. 오늘 투어 인원은 20명 남짓. 가이드님은 베테랑의 향기가 난다. 가수로 치면 음을 가지고 노는 수준에 이른 사람같이 안내하는 거나 설명이 능숙하면서도 여유로웠다. 가이드 투어를 몇 번 하다 보니 이제 딱 보면 오늘 투어가 어떨지 대충 짐작이 된다.
콜로세움
콜로세움이 보이는 곳에서 옹기종기 모여 앉아 설명을 들었다. 아침에 더 뚜렷하게 보이는 콜로세움을 계속 바라보니 얼마나 가슴이 벅차는지... 현대 도시에서 고대 건축물을 본다는 게 계속 꿈만 같다. 오늘 투어엔 내부 관람이 없어 아쉬웠지만 가이드님은 시간이 된다면 꼭 들어가 볼 것을 권유했다. 내일은 자유시간이라 이곳에 꼭 들어가 보리라 다짐했다.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콜로세움 옆에는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이 있었다. 보통 개선문이라고 하면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을 떠올리는데 원조는 여기란다. 전쟁에서 이기고 아주 당당하게 저 문을 통과했겠지? 화려한 문양과 조각들이 매우 인상 깊었다.
포로 로마노
조금 더 걸으니 포로 로마노가 보인다. 이곳은 과거 로마인들이 생활하던 곳으로 공공건물, 신전, 시장 등이 있는 곳이다. 그리스 아테네에서 봤던 아고라처럼 크고 작은 돌들이 널려있고, 일부는 복원 중에 있었다. 이곳도 자세히 보고 싶어 내일 다시 가서 보기로 했다.
이렇게 소개만 하고 다른 곳으로 계속 이동하는 걸 보니 로마에는 정말 볼거리가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이드님은 우리를 편안하게 안내해주시며 끊임없이 설명해주셨는데 걸어가며 보는 거의 모든 것들이 의미 있는 볼거리들이었다.
로마는 도시 자체가 박물관이 맞다.특히 현대적인 고층 건물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는데 이는 이탈리아 사람들이 역사적 흔적들을 보존하기 위해 현재의 불편함 들을 기꺼이 감수하며 옛 건물을 그대로 써서 그런 거라고 한다. 실제로 내가 묵고 있는 민박집도 100년이 훌쩍 넘은 건물이었고, 그래서 엘리베이터도 수동이었던 것이다. 건물이 낡아 보이고, 불편한 것 투성이어도 역사적 가치를 존중하며 그것을 지켜나가는 사람들의 마인드가 이탈리아를 세계적인 관광지로 만든 발판이 되었던 게 아닌가 싶다.
우리는 캄피돌리오 광장 등을 더 돌아보고 점심을 먹었다.가이드님의 추천을 받아 삼삼오오 모여 식당에 들어갔다. 파스타와 피자를 시켰는데 정말 맛있었다. 이렇게 검증된 곳에서 먹었어야 했는데 어젠 너무 모험을 했더랬지. 한낮의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야외 테이블에서 먹는 점심은 정말 꿀맛이었다. 특히 여행이라는 우연으로 만난 낯선 사람들과의 대화도 이제는 익숙하고 즐겁다.
판테온
점심식사 후 식당 바로 앞에 있던 약 이천 년 전 지어진 판테온을 보러 갔다. 이곳은신전으로 만들어진 곳이다. 외관만 봐서는 뭔가 단단하고 견고한 요새같이 어두컴컴하게 생겼는데 안으로 들어가니 천장에서 들어오는 햇빛으로 인해 매우 밝았다.내부는 성당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천장을 돔 형식으로 지었는데 중앙에 받쳐주는 기둥 없이 이것을 완성했다는 건 당시의 건축기술이 대단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한다. 이렇게 유럽여행을 하면서 이천 년 정도 되는 건물들을 몇 개 보다 보니 이제 몇백 년 된 건물은 그저 그렇게 느껴진다. 유럽 고대사의 본고장인 그리스와 로마를 지나와서 그런가 보다.
스페인 광장
트레비 분수
영화 '로마의 휴일'에서 인형 같은 오드리 헵번이 공주 치마를 나풀거리며 있던 스페인 광장. 생각보다 좁았다.
로마에서 엄청 유명한 트레비 분수. 공사 중이었다. 관광객들을 위해 중간에 철제 다리를 만들어 가까이서 볼 수 있게 해 놨는데 그냥 느낌은 공사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기대를 많이 하고 온 내 잘못인 건가. 아니면 오후로 갈수록 지친 내 컨디션 때문인 건가. 로마에서 유명한 이 두 곳은 내겐 그저 그랬다.
전체적으로 약간 지친 투어객들을 위해 가이드님이 준비했다며 로마의 유명 티라미슈를 소개해 주신다. 긴 줄을 뚫고 겨우 산 티라미슈. 앉을자리도 없어 가게 옆쪽에 서서 사람들과 함께 먹었다.
"우와~ 진짜 부드럽고 입에서 살살 녹는 게 너무 맛있어요!"
사람들 모두가 만족했다. 계속 먹고 싶어지는 맛. 로마에 와서 먹었던 음식 중에 김치찌개 다음으로 맛있었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티라미슈의 그 맛이 아직도 입안에서 맴도는 것 같다.
오늘 투어는 저녁 7시가 되어 끝났다. 10시간 이상을 걸은 셈이다. 다리가 정말 많이 아팠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저녁으로 간단히 먹을 샌드위치와 요거트, 물을 샀다. 숙소로 걸어가면서 목이 말라 페트병을 급히 열었는데 탄산 빠지는 소리가 난다. 이게 뭐지? 한입 먹어보니 탄산수다. 난 이거 맛이 없어서 안 먹는데... 힘들어서 정신없이 아무거나 눈에 띄는 대로 집어왔나 보다. 그다음 요거트를 한껏 기대하며 한입 먹었는데 그리스에서 먹었던 맛이 안 난다. 마지막으로 샌드위치를 한입 베어 물었더니 맛이 밍밍하다. 하아... 힘든데 힘든 게 겹친 느낌이다. 그냥 빨리 가서 씻고 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