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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숨비소리 Mar 04. 2023

34번과 2번

스터디카페

몸이 사시나무 떨리 듯 떨렸다. 새벽공기는 차디 찼다. 독서실에서 나온 길이었다.


학창 시절 무언가 돈을 내고 배우거나 경험한 기억은 거의 없다. 유치원도 다닌 적이 없고 학원은 딱 2번의 경험이 다였다. 한 번은 태권도 학원. 태권도를 다니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누나를 조르고 졸라 태권도 학원에 다녔다. 딱 이틀. 나보다 어린아이들도 다 하는 자세를 못한다는 열등감에 5G급 판단으로 이틀 만에 포기했다. 또 한 번은 컴퓨터 학원이었다. 컴퓨터가 고가였기도 했고 마냥 멋져 보여 또 누나를 조르고 졸라 수강을 했다. 인생 제대로 된 첫 학원이었다. 스케치북에 키보드를 그리고 타자연습을 했다. 그렇게 컴퓨터 학원을 몇 달 다녔다. 아주 열정적으로.


당시 주연컴퓨터라는 회사에서 타자를 빨리 치는 대회인 타자경시대회(맞나?)가 있었는데 2등을 했다. 개근상을 제외한 첫 상을 탄 순간이었다. 공부는 딱히 흥미가 없었다. 일요일이 내 번호와 겹치길 바라는 그런 학생이었다. 그렇기에 그 흔했던 독서실을 갈 일도 없었다.


어느 날 친구들의 손에 이끌려 독서실이란 곳을 처음 갔다. 이쁜 여학생들이 많다는 친구들의 말은 남녀가 나눠진 방으로 인해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딱히 무엇을 공부해야 할지 모른 체 교과서며 영어사전이며 뒤적이며 친구들의 행동을 따라 했다. 그렇게 날밤이라는 걸 세웠다. 첫 독서실과 첫 날밤이었다.


30년은 더 넘은 기억. 독서실 풍경보단 그날 새벽 공기가 더 뚜렷이 기억나는 날. 그 후 독서실을 가본 기억이 없다. 그랬던 내가 언제부터인가 휴일 이른 아침이면 꼬박꼬박 발걸음을 하는 곳이 있다. 스터디카페. 휴일 외엔 늦은 야근 후 찾는 곳이기도 하다. 둘의 공통점은 아이들이 잠에 빠진 시간이란 것. 대체로 아이들이 잠들면 모든 관계의 시간이 끝난다. 그리고 남은 몇 시간은 오롯이 나만의 시간이 된다.


독서실의 업그레이드판인 스터디카페에 오면 마음이 편하다. 서재를 가지는 것이 로망인데 스터디카페 로망의 30퍼센트 정도 맛볼 수 있는 공간이다. 휴일 아침은 높은 확률로 혼자인 경우가 많다. 깨끗이 정리된 곳. 텅 빈 공간엔 나의 행동에 따른 소리만 들릴 뿐이다. 내가 찜해놓은 자리에 앉는 호사스러움도 누릴 수 있다. 34번과 2번. 나만의 명당자리다.


34번은 집중공간에 마련된 자리다. 이곳은 키보드 소리도 낼 수 없는 공간이다. 연필이나 책 넘기는  소리와 같은 순수 아날로그적인 소리만 허용된 공간. 책을 읽을 때 이용한다.


2번은 카페공간에 마련된 자리다. 이곳은 키보드 소리까지 허용된다. 잔잔한 경음악이 흐른다. 과하지도 작지도 않은 소리로. 지금은 진추하의 <One Summer Night>이 흘러나오고 있다. 대체로 많은 곡은 그냥 흘러 넘어가지만 지금처럼 좋아했던 곡이 흘러나오면 귀가 쫑긋해진다. 그리고 잠시 추억에 빠지는 즐거움을 만끽한다. 창가에 위치한 2번 자리는 글을 쓸 때 이용한다.


얼마 전 까진 34번 자리를 주로 찾았다. 이 자리에서 꽤 많은 책과 만났다. 2~3시간이 후다닥 지나갔다. 토일 이틀이면 웬만한 책은 완독이 가능했다. 지금은 주로 2번 자리를 찾는다. 2번 자리에 앉으면 자연스레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내어 켠다. 마우스를 점검하고 키보드 위로 손을 올린다. 잠깐 멍을 때린다. 그리고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생각을 모니터로 옮긴다. 2~3시간 후다닥 지나간다. 늘 그렇듯 쓴 글보다 지워진 글이 더 많아 남겨진 글은 얼마 없다.   


시계를 본다. 9시. 아이들이 일어날 시간. 책상 위의 소소한 짐들을 챙겨 문을 나선다. 30년 전 그날처럼 아침 공기는 여전히 차다. 하지만 그때와 다르게 공기가 상쾌하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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