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 발달과 윤리적 문제 #창의성의 어두운 면
인공지능, 생명공학 등 첨단 기술의 발전에 따라 인류는 전에 없던 새로운 윤리적, 도덕적 문제와 맞닥뜨려야 할 상황을 맞고 있습니다.
자율주행차가 상용화된 세상, 생각하기도 싫을 끔찍한 상황을 하나 가정해 보죠.
달리던 자동차의 브레이크가 고장나 제대로 멈출 수 없습니다. 앞에는 마침 횡단보도를 건너던 10여 명의 사람들, 오른쪽 보행로에는 노인 한 분이 반려견과 산책 중이고요. 왼쪽으로는 중앙선 너머로 아슬아슬한 낭떠러지가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어떤 식으로든 사고는 피할 수 없는 불가피한 상황. 자율주행차의 프로그램은 셋 중 하나는 반드시 선택해야 합니다.
어떤 게 가장 윤리적인 선택일까요? 혹은, 어떤 게 그나마 가장 덜 나쁜 선택일까요?
이 딜레마는 기술 발달로 벌어질 새로운 문제인 것 같지만 실은 오래도록 인류를 윤리적, 철학적으로 고민하게 만든 고전적인 ‘트롤리 문제trolley problem’가 조금 변형된 것입니다.
원래의 설정은 브레이크 고장으로 멈추지 못하고 달리는 열차를 그대로 둬서 선로 저 앞에 일하고 있는 5명을 죽도록 둘 것인가, 선로 전환기를 조작해 옆 선로의 1명을 대신 희생시킬 것인가 하는 이러기도, 저러기도 쉽지 않은 봉착 상태입니다.
베스트셀러 『정의란 무엇인가』(김영사, 2010)로 잘 알려진 마이클 샌델 하버드대학교 교수도 다룬 바 있지요.
‘그래도 5명보다는 1명만 희생되는 게 나은 거 아닌가?’ 하는 생각, 즉 ‘최대다수의 최대행복’ 원칙에 바탕을 둔 공리주의적 접근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동의합니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간단치 않은 것은, ‘단지 더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살릴 수 있다는 이유로 다른 한 사람을 죽도록 하는 게 온당한가’ 하는 반론에서부터 ‘대신 희생 당할 그 1명이 만약 당신의 가족이라면?’과 같은 추가적인 고려 요소에 속수무책이 되어버리고 말기 때문이죠.
앞선 자율주행차의 예에서는 무엇이 ‘최선의 결정’일까요? 더 많은 사상자를 내더라도 진행 방향을 그대로 유지해야 할까요? 아니면 방향을 틀어 조금이라도 사상자를 줄이는 게 맞을까요?
어떤 이는 왼쪽의 낭떠러지로 향해 자동차에 탄 사람이 희생되게 하는 게 옳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자동차 회사에서 그렇게 프로그래밍 한다면 과연 어느 사람이 그 회사의 자동차를 사려 할까요?
당분간은 이런 힘겨운 선택의 기준을 정하고 소프트웨어를 프로그래밍하는 일을 인간이 담당하겠지만, 더 먼 훗날에는 어쩌면 그런 기준과 결정권마저 인공지능에게 넘겨줘야 할 지도 모릅니다.
물론, 앞선 시나리오는 단지 최악의 상황을 가정한 것일 뿐 애초에 이런 딜레마에 처하지 않도록 미리 회피하는 방향으로 자율주행 시스템을 설계하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다고도 말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앞으로 기술 발전이 가져올 엄청난 변화, 그에 따른 여러 가지 윤리적 문제가 모두 다 해소되는 건 아니죠. 자율주행차 말고도 수많은 영역에서 문제가 떠오르고 있으니까요.
생명공학을 통해 인간의 수명을 무한대에 가깝게 늘린다?
부모의 좋은 유전자만 선택해 ‘슈퍼 베이비’를 낳게 한다?
뇌나 몸에 칩을 삽입해 지적 능력을 높이고 건강을 관리한다?
안면인식 카메라로 테러와 범죄를 예방하고 시민을 보호한다?
재난 상황에서 로봇을 활용해 위험에 빠진 사람을 구해낸다?
…
과연 이런 선한 의도, 좋은 구호들이 말처럼 정말 좋은 결과만 가져올까요?
인간과는 달리 인공지능은 인종, 성, 장애의 유무, 정치 성향이나 재산과 소득 수준, 사회적 지위에 차별을 두지 않고 인류 모두에게 유용한 수단, 도구가 돼 줄까요?
인공지능이 스스로 자기 의지와 윤리 기준까지 갖게 된다면 그건 과연 어떤 모습일까요?
- 스티븐 호킹(Stephen Hawking, 1942~2018), 세계적 물리학자
자유 의지를 갖게 될 강력한 인공지능의 등장이 ‘인류에게는 최고의 일도, 최악의 일도 될 수 있다’고 2018년 타계한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 박사가 경고했습니다.
마치 칼이라는 중립적인 도구가 음식을 만드는 데에도, 생명을 해치는 데에도 달리 쓰일 수 있는 것처럼요.
물론 호킹 박사는 우리가 “인류와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인공지능을 만들어낼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고 낙관하긴 했습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까지보다 훨씬 더 많은 윤리적, 도덕적, 철학적 고민이 필요할 거라고 강조했습니다.
결국 미래 기술 발전으로 대두될 여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창의적 방법에 대한 주요 의사결정은 창의성과 도덕성을 함께 갖춘 인간의 몫이어야 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점점 더 많은 논의가 벌어지고 있는 주제가 바로 기술technology과 윤리ethics 사이에서 벌어지는 여러 문제, 나아가, 창의성creativity과 도덕성morality 둘 사이의 상관 관계입니다.
최근에는 ‘도덕적 창의성moral creativity’, ‘윤리적 창의성ethical creativity’, ‘창의적 도덕성creative morality’, ‘창의적 윤리creative ethics’처럼 양쪽을 조합한 용어들도 등장했지요.
창의성과 윤리, 도덕성의 관계는 비교적 최근에야 본격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했는데요, 아직 이렇다 할 똑 부러진 결론은 없어 보입니다.
한편에서는 도덕성이 창의성을 북돋워 준다고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도덕성이 오히려 창의성을 가로막는다고도 하고, 또 어떤 연구자들은 심지어 도덕성과 창의성은 양립할 수 없다거나, 둘 사이에는 별다른 상관 관계가 없다는 주장도 합니다.
그런데, 창의성과 도덕성의 관계에 대해 알아보던 중 한 가지 눈길을 끄는 이야기를 접했어요.
여러분은 누군가가 창의성을 부정적으로 말하는 걸 들어본 적이 있나요? 이 책도 그렇지만, 창의성에 대해서는 좋은 점만 말하지 창의성의 나쁜 점그런 게 있다면.
이제 누구도 말하지 않는 창의성의 ‘어두운 면’에 대해서도 한 번 들여다 볼 차례입니다.
2015년 말, 세계적인 경영학 관련 잡지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Harvard Business Review; HBR에 이런 도발적인 제목의 글이 실렸습니다.
개인, 기업, 사회… 모두가 창의성을 흠모하고 예찬합니다. 새롭고 유용한 아이디어, 해결책, 제품을 만들어내는 그 능력이 혁신을 가능케 하고, 경쟁자와 차별화할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죠. 미래 글로벌 리더의 중요한 자질로 손꼽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창의적이 된다는 것being creative’에는 ‘부인할 수 없는 어두운 면an undeniable dark side’도 있다고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는 지적합니다.
창의성이 부도덕하고 비윤리적인 행위를 부른다?!
하버드대 경영대학원의 프란체스카 지노Francesca Gino 교수와 듀크대 경영대학원의 댄 애리얼리Dan Ariely 교수는 일련의 공동 실험을 통해 이 가설을 검증해 보였습니다.
지노 교수는 획기적 연구로 많은 상을 휩쓴 조직행동 연구가로 디즈니를 비롯해 골드만삭스, 허니웰, P&G 등 유수의 기업에 리더십, 조직 심리 등과 관련한 컨설팅과 강연을 해 왔습니다.
애리얼리 교수의 경우 행동경제학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로 『상식 밖의 경제학』, 『거짓말하는 착한 사람들』, 『루틴의 힘』, 『부의 감각』 등의 책으로 국내에도 많이 알려진 학자죠.
두 교수는 창의성이나 독창적인 사고 방식 그 자체만이 아니라 창의성이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는 방식과 환경에까지 주목하며 몇 가지 흥미로운 실험을 벌였습니다.
예를 들어, 5분 동안 몇 개의 간단한 수학 문제를 풀게 한 다음 정답 수에 따라 금전적 보상을 제공하는 등의 그런 것들이었는데요, 물론 거기에는 정교하게 설계된 장치가 숨어 있었죠.
참가자들이 더 큰 보상을 얻기 위해 자신의 양심을 속이거나 협력해야 할 같은 팀 동료에게 뻔뻔한 거짓말을 할 수도 있는, 그런 유혹과 도덕적 갈등의 상황을 설정한 것입니다.
윤리적 딜레마의 상황에서 창의성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알아보고자 한 것이었지요.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창의적인 사람들, 혹은 자기가 창의적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이들보다 훨씬 더 속임수를 많이 쓰더라는 거죠.
스스로를 창의적이라고 자부또는 자만?하는 사람들은 ‘나는 보통의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하며, 따라서 ‘특별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다’는 식의 우월 의식을 많이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나아가, 이들은 창의성을 통해 좋은 성과를 낼 수 있다면 규칙을 무시하고, 심지어 남을 속이거나 남의 것을 훔치는 등 ‘부정한 방법을 써도 괜찮다’는 태도를 보이기까지 했죠.
그만큼 자신의 잘못을 합리화하는 데도 뛰어났습니다. 창의성이 뛰어난 사람일수록 더 죄책감 없이 손쉽게 자신의 부정 행위를 정당화했고요.
이 모든 연구 결과가 가리키는 결론은 명확했습니다: 창의적인 사람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는 데 능하지만, 그 과정에서 도덕적으로 문제가 될 행위를 할 가능성도 크다.
창의성을 소수에게만 허락된 드물고rare, 특별한special 재능으로 칭송하고, 떠받들고, 장려하는 환경과 문화일수록 이 같은 창의성의 어두운 면모는 더 두드러지게 나타났습니다.
원래 창의성이라는 것이 ‘으레 그렇게 해 오던 방식’, 즉 기존의 규칙을 벗어나 관습을 타파하는 것과 뗄래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죠. 이전의 질서를 벗어나거나 아예 무너트림으로써 새로운 아이디어, 혁신적 제품을 만들어내는 거니까요.
그런데, ‘기존 방식을 깨트리는 것’이 혁신을 만들어 내는 대신 최소한의 합의된 규칙을 어기고 타인에게 피해를 주게 된다면 조직에게는 큰 비용의 대가를 가져올 ‘위험’ 요소가 될 겁니다.
창의성과 윤리의 관계는 그런 의미에서 개인뿐 아니라 기업에게도 큰 골칫거리로 남아 있습니다.
평균적으로 하나의 기업은 임직원의 부정 행위로 인해 연 매출의 약 5%에 이르는 손실을 보고 있다고 합니다. 전 세계로 보면 수천 조 원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규모죠.
물론, 사기나 횡령 등으로 인한 기업의 손실이 모두 창의적인 사람들만의 책임인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분명한 점은 창의성을 과도하게 특출난 재능으로 띄워주고 임직원들로 하여금 그런 분위기에서 일하게 하는 회사일수록 의도와는 달리 부작용을 훨씬 더 키우는 셈이 된다는 것입니다.
21세기 기술 발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창의성은 윤리-도덕과 함께 균형 잡힌 형태로 추구되어야 할 필요성이 커지고 있습니다.
지노 교수는 애리얼리 교수와의 공동 작업 이후 몇 년 뒤 아래와 같은 제목의 후속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악한 천재성: 어떻게 부정함이 더 큰 창의성으로 이어지는가’
얼핏 ‘창의적이려면 악해야 한다’는 말처럼 들릴 수도…
하지만, 아무리 창의성이 좋기로서니 인성을 포기하면서까지는 아니겠죠?
- 앨버트 아인슈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