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다움을 찾는 여정과 부모의 덫
나다움을 찾는 일은 단 한 번에 가능하지 않다. 이 진리는 어디에나 통한다.
책을 쓰는 일도 두 번, 세 번 반복되는 경험 속에서 진짜 나다운 글이 나온다.
첫 번째 쓴 글이 나를 가장 잘 반영한 글인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렇다고 처음 글을 계속 업데이트하는 일은 어리석은 일이다.
두 권, 세 권 책을 내는 과정을 통해 처음 쓴 글이 나다운 글이라는 것을 발견한다면 상황은 아주 다르다.
아이를 기르는 과정에서 부모는 정답을 빨리 알려주고 싶어 안달이다.
아이가 잘못된 길을 선택하는 모습을 보고 있는 것은 부모에게는 너무나 힘든 일이다.
실패의 경험이 중요하다는 말은 성공한 사람들이 너도나도 말하는 성공 불변의 법칙임에도 부모는 그 실패를 어떻게 하면 줄여줄 수 있는지 고민한다.
더 위험한 것은 자신이 알고 있는 성공 경험이 정답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우연히 아이가 부모가 생각하는 맞는 길을 잘 찾았다면 그 이상의 시행착오를 허락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그 시간이 너무 아깝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정답이 나온 이상 틀린 답을 경험할 이유나 필요를 알지 못한다.
아이의 입장에서는 어떨까? 아직 정답을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 인생에 정답이라는 것이 있기는 한 건가 싶다 – 자신의 선택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니 다른 것도 부딪히고 깨져보고 경험해보려 할 것이다.
그런 다음 나의 선택이 정답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아이의 마음은 확신에 차게 된다.
나의 선택이 더 이상 불안하지 않은 확신에 찬 상태로 아이는 그다음 스텝을 밟아나갈 것이다.
더이상 뒤돌아보지 않고 큰 걸음을 뗄 것이다.
부모의 말에 의해 자신의 불안감을 떨칠 기회를 얻지 못한 채 다음 스텝으로 가는 경우는 어떨까.
혹시 이보다 좋은 선택이 있지는 않은지 자꾸 미련이 남아 뒤돌아보게 된다.
확신이 없는 발걸음은 보폭이 짧을 수밖에 없다.
쉬운 길이 빠르다고 생각하는 부모의 잘못된 판단으로 아이는 더 큰 실패를 준비 없이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누구나 마음의 덫이 존재한다. 나의 선택을 흔드는 것 중 하나는 부모라는 이름의 희생이라는 덫이었다.
관련 영화로 "마더"를 추천받아 보게 되었다.
아들 역에 원빈, 엄마 역에 김혜자 배우의 명품 연기로 2시간 반을 몰입해서 보았다.
지적장애를 가진 아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엄마.
아들이 보이는 거리에서 일을 하면서 자신의 손가락이 베이는지도 모르고 아이의 사고를 보고 달려가는 엄마. 덕분에 엄마는 아이의 문제마다 바로 달려가 해결을 한다.
그 방법이 결코 도덕적이거나 정당한 방법이 아닐지라도.
그 방법이 아이의 자존감을 올리는 방법이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의 길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나의 선택의 방향이 무엇을 향하는지 알지 못한 채 오로지 아들을 보호하는 것에만 몰두하는 엄마의 모습은 영화를 보는 내내 마음을 복잡하게 한다.
이 모습 앞에서 우리는 과연 자유로울 수 있을까?
아들이 살인자로 지목되고 정확한 정황이 밝혀지지 않은 상황에서 감옥에 간 아들은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아이가 아니라고 믿는 엄마. 아들의 무죄를 밝히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다하는 엄마. 그 장면을 보는 내내 나는 그 엄마의 편에 서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믿고 싶은 부모의 마음, 어떻게든 진범을 잡아서 아들의 누명을 벗겨내리라는 엄마의 마음은 부모라면 다 같지 않을까.
리어카를 끄는 고물상 아저씨가 그날 현장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엄마는 아저씨를 찾아가고 그곳에서 뜻밖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아들의 살인을 목격한 유일한 목격자의 증언. 엄마는 그 자리에서 둔기로 미친 듯이 그의 머리를 내려치고 살인을 저지르고 만다.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불을 지르는 치밀함까지 보인다.
나는 이 장면에서 고물상 아저씨가 하는 말이 거짓이기를 바랐다. 아들에게 자신의 잘못을 뒤집어씌우는 것이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런 판단을 하기도 전에 이미 일은 벌어졌다. 아들의 살인이 분명해진 상황에서 그녀는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한다. 아들의 살인을 덮는 일이 아이를 보호하는 임무이고 최선의 방법이라고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말았던 것이다.
아이는 기억하고 있다. 아이는 엄마의 모든 행동의 기류를 읽고 있었다.
어린 시절 자신에게 농약을 먹여 죽이려 했던 엄마.
자신의 잘못이 언제나 문제없이 해결되는 경험들.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바른 것인지 알지 못한 채로 어떤 일이든 엄마만 있으면 문제는 해결이 된다.
어떤 어려운 방법으로 해결이 되었는지도 알 수 없다. 알 필요도 없다.
이렇게 아이는 살인을 저지르고도 아무렇지 않게 엄마 옆에 와서 잠드는 괴물이 되었던 것이다.
마지막에 진범이 잡혔다고 아들이 풀려났다.
결국은 아들이 풀려났지만 엄마의 노력과는 상관없이 또 다른 지적장애를 가진 아이가 누명을 쓰고 풀려났다.
김혜자 배우가 묻는다.
"넌 엄마 없니?" "네." 혜자는 눈물이 하염없이 흐른다.
엄마가 없는 그 아이가 내 아들 대신 그 자리에 있다.
엄마는 아이를 감옥에서 꺼낼 수 있었다.
하지만 아이는 살인을 해도 엄마만 있으면 괜찮은 그런 사람이 되었다.
살인자 아들과 그 살인을 덮기 위해 살인을 저지른 엄마. 사람으로서 기본적인 도리, 도덕성을 상실한 인간을 키워낸 엄마. 아이는 엄마가 자신의 죄를 덮기 위해 한 살인도 알고 있다.
엄마 김혜자는 영화의 시작과 끝에서 춤을 춘다.
자아를 상실한 한 인간의 몸짓. 엄마라는 이름으로 아들을 위해서는 체면도 도덕도 인간의 존엄마저도 외면했던 사람. 무엇을 위해 이렇게 살아왔는지 회한과 상실감이 느껴진다.
마지막 장면에서는 아들을 두고 관광버스에 몸을 맡긴다.
충격과 아픔의 기억을 잊게 한다는 혈자리에 침을 놓고 음악에 묻혀 사람들 사이로 파고든다.
이제 누구의 엄마라는 이름을 내려놓고 평범한 한 사람으로 돌아가고 싶은 그녀의 몸짓을 본다.
지적장애를 가졌기에 더욱이 눈을 뗄 수 없었을 것이라는 설정.
봉준호 감독은 왜 지적장애를 가진 아이로 주인공을 설정했을까?
이 시대의 부모, 모든 것을 쫓아가 바로 해결해주는 헬리콥터 맘이 된 엄마들의 모습.
이런 환경에서 자란 아이가 과연 온전한 정신을 가질 수 있을까.
겉으로 보이는 육체가 멀쩡한 아이라도 그런 환경이라면 아이는 도덕성 상실, 판단력 상실의 인지장애를 가진 것과 다름없음을 시사하는 것이 아닐까.
아이에게 주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본다.
이 험난한 세상을 홀로 잘 견뎌낼 수 있는 힘.
어떤 일을 만나도 용기 있게 담담하게 맞설 용기와 실패해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회복탄력성.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타인을 존중하고 배려할 줄 아는 따뜻함.
옳고 그름을 판별할 줄 아는 올바른 가치관을 가진 아이로 자라도록 돕고 싶다.
나의 양육 태도는 그 방향과 맞는지 생각해본다.
지나친 관심과 간섭으로 아이의 자율성과 자존감을 훼손하고 있지는 않은지.
공부한다는 이유로 자신의 몸과 주변을 스스로 돌보지 못하는 아이로 키우고 있지는 않은지.
부모의 환경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느끼게 된다.
나에게는 희생이라는 덫이 있다.
그것은 분명 내 어머니의 헌신적인 사랑이 만들어놓은 페르소나이다.
우리 삼남매를 위해 자신의 삶 전체를 희생해온 우리 엄마.
나에게 가장 큰 스승이자 멘토이자 사랑인 우리 엄마.
엄마는 지금도 아픈 몸으로 나에게 아이스박스 가득 음식을 장만해서 보내신다.
그런 엄마에게 나는 많은 영향을 받았고 아이들에게 집중하고 헌신하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한 일로 여기며 살아왔다.
이제 나는 다른 모습으로 아이들 앞에 서고 싶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고 꿈을 향해 도전하는 사람.
가족들에게 각자의 역할 분담을 당당하게 요구하는 엄마.
작은 들꽃 하나도 지나치지 못하는 섬세함을 지닌 사람.
자연을 사랑하고 사람과의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한 사람으로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힘이되고 좋은 에너지를 전하는 그런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이제 엄마는 그런 존재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