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사람 이야기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제 브런치를 쭉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저는 국내 K 통신사 신입사원으로 직장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무슨 회사인지 저렇게 적으면 다 알 텐데 굳이 K통신사라고 쓰는 게 좀 이상합니다만... 일단 익명화했다는데 의의를 둡니다.)
흙수저에 저스펙인 제게 대기업 구성원들은 다들 별세계에서 온 사람들 같았습니다. 네, 물론 지금 생각하면 엄청난 자격지심인데요. 그래도 어찌나 다들 대단해 보이던지. 그래서 입사 후 꾸준히 사내외의 다양한 모임 활동을 했습니다. 대단한 사람들이 많아서, 만나면 자극이 되었거든요.
그중 이름도 거창하게 '청년 이사회'를 표방하는 블루보드(Blue Board)라는 조직이 있었습니다. 열심히 활동하면 회사에서 해외 연수도 보내주는, 회사에서 힘을 많이 실어 준 모임이었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날고 긴다는 선후배들이 여기 지원했기에 지금 생각해도 훌륭한 사람들이 많이 모였습니다. (저도 거기 들어갔으니 저도 훌륭한 사람입니다...?!)
이가희 후배님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이런저런 활동을 하며 옆에서 지켜보니, 이건 뭐 보통 에너지가 아닙니다. 물 대신 레드불을 흡입하나 싶은 그런 느낌. 적혈구 대신 카페인이 가득한 거 아닌가 싶게 매사에 열정적이었습니다. 아아.. 저도 어디 가서 대충 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비할바가 아니었습니다. 조별과제 조장 시키고 싶은 그런 느낌이라면 아실까요. 십수 년 전 일이지만 생생한 기억입니다.
이후 저는 금융회사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습니다. 페이스북으로 근황을 공유하며 살았는데, 어느 날 이 친구가 퇴사를 한다고 합니다. 스타트업을 창업한다는 거였습니다. 책을 읽다가 좋은 글귀를 공유하는 그런 서비스였습니다.
아이템의 좋고 나쁨보다는 왠지 이 친구가 한다고 하니 그냥 잘 되겠구나 싶었습니다. 내가 못 보는 어떤 가능성을 본 것이겠구나 궁금했고, 잘할 것 같아서 앱도 써 보며 멀리서나마 응원했습니다.
생각만큼 앱은 잘 안되었던 모양입니다. 대신 언제부터인가 SNS로 책 소개 해주는 유튜버를 하고 있었습니다. 저도 생업이 바쁘다 보니 보면서 '아, 앱 홍보 겸 덕업일치 하나보다'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점차 앱보다는 후배님의 유튜브가 여기저기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모르는 사람도 링크를 막 걸고, 뉴스에서도 나오질 않나.. 스타트업 대표가 본업이 아니라 유튜버로 더 잘 되고 있었습니다. 저는 또 멀리서 생각했습니다. '이야 인터넷 격언 '될놈될'이 틀린 말이 아니었구나. 능력자는 대충 해도 다 되나 보다. 역시 남 걱정 말고 나나 잘해야...' 아는 사람이 잘 되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고 그랬죠. 그런데 제가 아예 모르는 영역이라, 부러움보단 응원하는 마음이 더 컸습니다.
그리고는 무슨 오프라인 책 읽는 공간도 내고, 직접 책도 쓰다가, 아예 출판사를 차렸다는 소식도 들려왔습니다. 아니 n잡러가 대세인 첨단 사회라지만 몸이 몇 개인 건가.. 저게 다 혼자되나? 회사 하나 다니는 것도 허덕대는 나는 뭔가 하는 현타가 또 강하게 밀려옵니다. 그래 난 한 개라도 열심히 하자 이런 자극도 되었죠.
이렇게 지난 십여 년을, 저는 이 후배님을 만나지는 못하고 모니터 너머로 지켜보며 일종의 관객 같은 느낌으로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타인의 인생을 멀리서나마 지켜보는 것, 이게 영화나 드라마 아닐까요. 주인공에게 은근 몰입할 수 있었습니다. 어렵게 들어온 대기업을 때려치우고 나가는 용기, 이것저것 하고 싶은걸 해 보는 용기 모두 저는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었거든요.
그런데 이 친구가 창업하고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모아 책을 냈다고 페이스북에 올렸습니다. 책 제목은 '자유롭기도 불안하기도'입니다. '회사는 전쟁터지만 밖은 지옥'이라는 윤태호 (미생 작가님) 아재의 말이 진짜일지 궁금했기에 냉큼 읽어보았습니다. 아 뭔가 책 바이럴을 위한 빌드업 느낌인데요. 네 빌드업 맞습니다. (내돈내산이지만 자연스러웠어) 회사 밖 생활이 궁금한 분들은 읽어보실 만합니다.
저는 저자를 알고 있으니까 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SNS로 가끔 보던 화려한 일상과는 달리, 망할 걱정에 잠 못 이룬 이야기들이 절절히 책 전반에 녹아있습니다. 처음 세운 스타트업이 저렇게 안되었을 줄도 몰랐고, 북튜버도 시간이 흐르면서 잘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면 대기업 퇴사가 후회스러울 법 한데 퇴사한 건 또 후회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음.. 역시 사업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닙니다. 저보다 어리지만 존경스럽기도 하고요. 저는 저럴 수 있을까 생각도 많이 들었습니다.
작년과 올해, 제가 회사에서 하는 일은 그룹전체의 중장기 금융전략 수립입니다. 거시경제 흐름을 안 볼 수가 없는데요. 올해, 내년은 전방위적인 불황이 확실시(ㅠㅜ) 됩니다. 4050 명예퇴직 뉴스는 이제 뉴스도 아닙니다. 배달이든, 치킨집이든, 무인 아이스크림 판매점이든 우리도 등 떠밀려 나갈 날이 곧 올 겁니다. 내 회사라고 말하지만 주주님들 회사지 제 회사는 아니니까요. 저 역시, 저만의 치킨집을 늘 고민하고 있습니다. 거기서 무슨 치킨을 팔지, 아니 애초에 오픈을 하긴 할지조차 모르겠습니다만.. 적어도 어디 개업하면 좋을지 목은 고민해 둔 상태입니다. 저 역시 등 떠밀려 가고 있죠 (물론 먹고 싶은 치킨이 있어서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미리 매 맞은(?) 사람들 이야기는 관심이 갑니다. 저를 비롯해 난 매 좀 덜 맞아보자 하는 분들께 살짝 추천해 봅니다. 긴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