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PTSD 오게 하는 영화 '그레이하운드'
인류에게 시간은 공평하다고 말합니다만 저는 안 믿습니다. 월~금의 시간과 토, 일의 시간은 분명 다릅니다. 다들 공감하시죠? 일요일 저녁 정신을 차려보면 개콘이.. 아니지 이건 넘 옛날 사람 티 내는 거고. 자고 일어나면 출근이라는 우울한 현실이 매주 다가옵니다.
그러니 주말, 휴일은 참 소중하죠. 다들 뭐 하고 지내시는지 모르겠습니다. 회사를 20년을 다니니 이제 회사의 가축, 즉 사축(社畜)이 다 되어서요. 알아서 여물 먹고 해 뜨면 일하러 나가는 건전한 소가 다 되었습니다. 저는 주말에는 웬만한 약속 없이 집에서 제 시간을 가지는데 집중합니다. 약속 잘 안 잡는 건 친구가 없어서 글도 쓰고 이것저것 할 게 많아서이고요. 돈이 아까워서 골프도 안 치니 주말을 비교적 온건히 혼자 쓰고 있습니다.
밤 11시부터는 능률이 잘 안 올라서 종종 영화를 봅니다. 지난 주말도 뭘 보지 티빙을 휘적거리다가 (다들 이러는 시간이 반이라고 하더라는) 그레이하운드라는 영화가 눈에 띄었습니다. 톰 행크스 형님이 나온다고 하니 신뢰도 상승에, 2차 대전 해상전 영화라고 하니 흥미가 생깁니다. 해상전은 영화로 만들기 쉽지 않을 텐데 어떻게 만들었나 궁금해서 보기 시작했습니다. 91분 밖에 안되니 짧아서 좋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그런데.. 그런데..
영화가 재미있는 건 둘째치고 이건 뭐 그냥 회사 이야기가 아닌가! 아니 이게 뭐지 탄성이 절로 나왔습니다. 더불어 강렬한 PTSD가... 크흑
오늘은 이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아주 단순합니다. 톰 행크스는 구축함 신임 함장입니다. 2차 대전이 한창이라 미국에서 출발, 대서양을 지나 유럽 전선에 보급품을 전달하는 게 임무입니다. 수십 척의 수송선을 호위하며 안전하게 이동해야 합니다.
문제는 독일의 U보트입니다. 전쟁에 관심 없는 분들도 한두 번은 들어보셨을 이름입니다. 독일이 2차 대전 때 만든 잠수함인데요. 대서양 바다를 장악하고 연합군을 공포에 몰아넣었죠. 이 U보트가 무려 6척이나 톰 행크스의 선단을 공격해 옵니다. 톰 행크스는 초임 함장으로서 이 위기를 이겨내야 합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감독이 톰 행크스를 죽일 것 같지는 않으니 대충 해피엔딩으로 자연스럽게 끝나겠구나~라는 상상을 하게 됩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그래서 큰 기대 안 하고 영화를 시작했습니다.
함장이니 만큼 톰 행크스는 수병들 방보다 훨씬 좋은 함장실에서 자고 일어납니다. 함교로 올라가면 조리장이 식사도 만들어서 대령합니다. 다들 함장 말에 집중하고 열심히 명령을 수행합니다.
U보트가 안 나타나고 잘 가면 좋겠지만 그럴 리가요. 어디선가 나타난 유보트는 톰 행크스를 비웃듯 어뢰를 쏘고 사라지고를 반복합니다. 잠수함의 무서움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어디 숨어있는지 알기 힘든데 갑자기 공격한다는 점이죠. 주인공이 지켜야 할 배도 막 침몰하고 동료 구축함도 공격을 받아 침몰합니다.
그 와중에 열심히 지휘를 하는 톰 행크스의 노력이 눈물겹습니다. 저도 몰랐는데 이 당시 어뢰는 자동유도가 아니라 직선으로만 갔었나 봅니다. 어뢰가 다가오는걸 망원경으로 봐 가며 좌현 우현 숨 돌릴 틈 없이 배 돌리고 그 와중에 적 잠수함 예상 위치로 기뢰 공격도 지시하고... 난리입니다.
주인공 버프가 있었음에도 결국 통 행크스의 배도 어뢰 공격을 받습니다. 포탑 하나가 완전히 날아가 버리고 화재진압 지휘를 합니다. 포탑에 있던 병사들은 모두 사망해서 적의 공격이 잠시 멈춘 사이 국기로 감싸서 바다에 던지는 장례식도 치릅니다. 군번줄만 회수하고 시신은 배에 둘 수가 없으니 수장하는 거죠. 죽은 병사 중에는 톰 행크스에게 아침식사를 만들어 건네던 조리장도 있었습니다. 밥 하는 시간이 아닐 때는 전투에 투입되고 있었던 겁니다.
병사와 장교들은 틈틈이 침상에서 자면서 전투를 하지만 톰 행크스는 커피를 계속 마시면서 지휘를 계속합니다. 여러 차례 공격으로 배가 흔들리고 유리창이 깨지며 신발에 피가 배어 나왔습니다만 적 잠수함이 계속 공격하니 쉴 수도 없습니다. 적들이 공격해 올 때마다 장교와 병사들 모두 함장만 쳐다보니 어딜 가겠어요.
옛날 영화 '붉은 10월호' 나 유명한 만화 '침묵의 함대'를 보신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해상전, 특히 잠수함전은 싸움이 별거 없습니다. '우현 10도 적 거리 1000!' '좌현 어뢰 접근' 이런 부관들의 대사가 난무하고 배우들이 표정으로 심각함을 드러내는 것이 반복됩니다. 이 가운데 영리하게 이 영화는 함장의 판단과 부하들의 기대를 반복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러다가 적의 위치를 파악하고 기뢰를 몽땅 쏟아 넣는 우리의 주인공. 그런데 U보트 폭발음이 안 들립니다. 알고 보니 독일군이 신무기를 만든 건데요. 잠수함 소리를 내는 허수아비를 보냈고 톰행크스는 그걸 적 잠수함으로 착각하고 무기를 다 써버린 거죠. 허수아비를 공격한 것 같다는 부관의 보고에 톰 행크스가 당황하자 수석부관의 말 한마디가 날카롭게 들려옵니다.
"함장님은... 아셨어야죠"
저는 함장도 아닌데 정신이 번쩍 들었는데요. 크던 작던 리더라는 자리가 가지는 무게감이 확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적군이 무슨 무기를 만들었는지 어떻게 다 알겠습니까. 당연히 함장도 모를 수 있죠.
그런데 부하들의 입장에서는 그게 아니었습니다. 사방에서 어뢰가 날아드는 전쟁통입니다. 부하들은 함장 명령을 잘 수행하는 것 외에 달리 살 방법이 없습니다. 내 목숨줄을 쥔 함장이 뛰어나길 바라는 건 살고 싶어서입니다. 지휘관이 똑똑하면 살 가능성이 높아질 테니까요.
저는 톰 행크스에 비하면 아주 작은 팀을 맡고 있고 보고서 잘 못썼다고 어뢰가 날아오는 건 아니지만 (...) 제게 이 장면은 상당히 무서운 장면이었습니다.
이후 톰 행크스는 밥도 못 먹고, 잠도 못 잔 체 U보트를 모두 격퇴합니다. 안전한 영역으로 들어서자 선원들은 모두 기뻐합니다. 톰 행크스는 그런 그들을 바라보다가 자기 방에 가서 쓰러져 잠듭니다.
90분의 짧은 영화이지만, 리더십에 대한 임팩트가 엄청난 영화였습니다. 구축함과 잠수함 사이의 해상전도 볼거리이지만 부하들의 시선과 리더의 고뇌가 더 볼만합니다. 2편을 제작 중이라고 하는데 나오면 극장에서 볼 생각입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