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는 것도 강박을 가지고 있진 않나요?
대한민국이 언제부터인가 열대가 된 것 같습니다. 열대야는 물론이고 동남아처럼 스콜이 쏟아지는 것을 보면 딱 그렇습니다. 동해안에선 한류에 사는 물고기가 안 잡힌다는 뉴스도 들린 지 꽤 되었죠. 네, 여름휴가를 갈 시점이 온 거죠.
저도 여느 월급쟁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터라 1년에 한두 번 해외여행을 갈까 말까입니다. 돈도 없지만 시간도 내기 힘든 게 현실이라 (눈에 습기가 차네요ㅜㅠ) 휴가 하루하루는 정말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지난 5월, 올해 여름휴가는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말레이시아 여행을 결정했습니다. 오로지 해외 1+1 항공권을 주는 카드 혜택을 받기 위해서요. 공짜 항공권을 주는 가장 먼 코스가 쿠알라룸푸르였기 때문입니다. 체리피커들의 블로그를 보니 가장 성수기에 가장 멀리 가는 게 이익이라는 말에, 망설임 없이 결정해버렸습니다.
일단 이렇게 되자 말레이시아는 제게 더 이상 사회과부도 속의 나라가 아니게 되었습니다. 패키지가 아닌 자유여행이기에 모든 걸 스스로 준비해야 합니다. 8월 출발 비행기 티켓을 끊었으니 3개월간 공부가 시작되었죠.
짬짬이 시간을 내서 블로그나 카페를 참고하고 서점 가서 말레이시아 관련 여행책자를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외국어에 자신이 있다면 현지 가서 큰 어려움 없이 잘 지내겠습니다만, 한국어도 자신이 없는 저로서는 사전에 열심히 대비하는 수밖에요.
처음 몇 주는 재미있게 여행 준비를 했습니다. 구글맵을 봐가며 여행지 사진들을 보면 즐거웠습니다. 그러나 정보 과잉 속에 다양한 스트레스에 노출되기 시작합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른바 '결정해야 하는 사항들' 이 나타나는 거죠.
7박 8일 동안 어딜 갈 것인지, 교통편과 숙박은 어떻게 할 것인지, 사람들이 많이 가는 맛집이 있는지, 뭘 봐야 하는지.. 정답은 분명 없습니다. 제 시간과 돈을 써서 다녀오는 여행입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정답이 있을 리 만무합니다. 하지만 저는 정답을 찾고 있었습니다.
'효율'이라는 정답을요.
살면서 처음 했던 해외여행도 취업 후 갔던 자유여행이었습니다. 그 뒤로도 가능한 자유여행을 했습니다. 패키지가 신경 쓸 것이 적다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만 저랑은 잘 맞지 않았습니다. 보고 싶은 건 더 보고, 안 보고 싶은 건 안 봐야 하는데 패키지는 그게 안되었죠.
그래서 여행 때마다 갈 곳을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보고 싶은 것을 정하고 동선을 체크합니다. 이동과 숙박에 대해서도 꼼꼼히 조사합니다. 조사를 하면 할수록 그 나라에 대해 배우게 되고 얻는 게 있었습니다. 너무 열심히 보다 보면 아직 출발도 안 했는데 그 나라를 다 보고 온 착각에 빠지기도 했죠. (이거 진짜입니다. 여러분도 노력하면 책상에서 세계일주가 가능합니다 -_-;;)
일견 좋아 보이지만 이런 식으로 여행을 준비하다 보면 그 자체가 스트레스가 되기 시작합니다. 여행에서 위기에 몇 번 빠지고 나면 더욱더 예민해집니다. 그동안 수많은 위기가 있었습니다. 터키에선 환승 비행기를 놓쳐서 발을 동동 굴렀고 상하이 홍차오 공항에선 공항버스 타는 곳을 찾느라 푸동공항의 비행기를 놓칠 뻔했습니다. 워싱턴에서는 숙소 예약을 잘못해서 캐리어를 끌고 슬럼가를 지나는 무서운 경험도 했습니다.
이러다 보니 여행 준비는 가능한 완벽을 기하려고 합니다. (일이나 공부는 왜 이렇게 안 하는지..) 문제는 강박을 가지다 보니 즐거워야 할 여행 준비가 슬슬 회사 프로젝트처럼 되어 가는 거죠. 길진세 대리가 길진세 전무에게 보고하며 진행하는 느낌이랄까요.
이렇게 글로 기술하면 어느 정도 일지 감이 안 오실 겁니다. 저는 여행 준비를 할 때는 말 그대로 Time line을 1시간 또는 30분 단위로 계획하고 움직입니다. 수면시간은 가능한 최소화하고 방문한 지역의 관광명소는 다 보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대표적인 예는 체코를 방문했을 때였습니다.
2016년 여름, 제가 다니던 대학원에서 현지 연수로 유럽을 가게 됩니다. 체코부터 시작해서 4개국을 여행하는 일정이었습니다. 다른 동기들은 회사에서 지원해주는 부분도 있어서 국적기를 타고 편안하게 간 반면, 저는 자비로 가야 했습니다. 그래서 가장 저렴했던 중국 동방항공으로 예약을 합니다. 세상일에 진리가 몇 가지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싼 데는 다 이유가 있다'는 거죠.
체코 프라하 공항까지 '가긴 가는' 이 비행기는 쉽지 않은 일정이었습니다. 토요일 낮 12시에 인천에서 상하이로 간 후, 일요일 00시 45분에 프라하로 출발해서 체코에 일요일 06:35에 도착하는 일정입니다. 동기들보다 2일 먼저 움직이는 코스입니다. (쓰고 있는데도 숨이 탁 막히는군요)
이 와중에 저는 '잘됐다! 상하이 구경도 하고 체코도 동기들과 다닐 곳 외에는 다 봐야겠다!'는 원대한 목표를 세웁니다. 일단 첫날 8월의 무더위 속에 상하이 샤오미 매장을 비롯 이곳저곳을 보고 다녔습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이코노미석에서 11시간 50분을 비행한 후, 체코 공항에 새벽에 내리자마자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동기들과 저녁때 합류할 프라하 호텔에 가져다 놓았습니다. 그리고는 바로 관광에 나섭니다.
그날 하루, 대학원에서 잡아 둔 코스를 제외한 프라하의 거의 모든 관광지를 다 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저녁때 동기들을 만났을 때는 너무 피곤해서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정신이 육체를 지배하고 있는 상황이었죠. 왜 이렇게까지 했던 걸까요. 그때 제 머릿속의 생각은 단 하나였습니다.
'이때 아니면 언제 여기를 다시 와서 볼까'
흔히 유복하게 자란 친구에게서 느끼는 아우라가 바로 이런 느낌인데요. 어디에 가서 무엇을 볼 때, 이번에 못 보면 다음에 보면 되지 라고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서는 여유라는 아우라가 나옵니다. 저는 그게 잘 안되었습니다. 여행지에서 한가롭게 카페에 앉아서 차 한잔 하는 것이 너무 어려웠습니다.
제 사전에 여행은 최대한 타이트한 일정을 소화하는 것이 미덕이었으니까요. 말레이시아 여행도 준비하다 보니 이렇게 변해갔습니다.
'효율'이라고 썼지만 '욕심'이 솔직한 말 같기도 합니다.
이번 여행도 준비하면 할수록 욕심을 부리고 있었습니다. 한창 열을 올리던 저는 여행을 보름 남겨둔 어느 날 자문하게 됩니다. 야근 후 집에 와서 새벽 1시에 말레이시아 지도를 보고 있던 순간이었습니다.
'나, 뭔가 힘든 거 아닌가? 왜 이러고 있지?'
휴가 준비가 또 하나의 업무가 되고 있는 것 같아서 제 나름의 과감한 결단을 내렸습니다. 두 가지인데요.
(1) 이 시간 이후로 더 이상 여행 준비에 시간을 쓰지 말자.
(2) 좋은 숙박시설에 들어가서 그냥 쉬는 하루를 보내보자
글을 읽고 계신 분들은 '아니 이게 뭐가 어렵다고 '결단' 씩이나 하는 거냐'라고 반문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게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불확실성을 안고 소중한 해외에서의 시간을 낭비하면 안 되는데! 호캉스를 할 거면 국내에서 하고 해외는 나가서 열심히 돌아다녀야 하는데!라는 생각이 내내 저를 괴롭혔습니다.
시간은 빛의 속도로 흘러 출국 당일이 되었습니다. 노트북을 가져가느냐 마느냐도 큰 고민이었습니다. 노트북을 가져가면 필시 업무고민도 할 것 같아서 부들거리는 손을 잡으며 집에 두고 나왔습니다. 그리고는 여행을 시작했죠.
그래서 저는 목표로 했던 '쉬는 휴가'를 했을까요? 혼자 평가해 보자면 100점 만점에 50점인 것 같습니다. 랑카위 섬이나 쿠알라룸푸르에서 유명하다는 관광지는 다 돌았으니 여유로운 여행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제 생전 처음으로 리조트에서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 하기'를 했으니 절반의 성공인 것 같습니다.
여행은 7박 8일이었고 리조트 숙박은 딱 중간 일정이었습니다. 재미있는 점은, 여행 중 가장 편하고 잘 쉬었단 기분이 든 건 리조트 숙박 때가 아니었다는 거죠. 마지막 2일간은 쿠알라룸푸르 근교를 하루 종일 버스 타고 다니는 현지 투어를 신청했습니다. 동선이고 자시고 없고 버스와 가이드님을 따라다니는 여행입니다. 그때 비로소 마음이 편해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여행 내내 제게는 내일의 일정, 남은 기간을 즐겁게 보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습니다. 반면 마지막 날이 다가올수록 더 신경 쓸 것이 없는 점이 절 편하게 한 것이죠.
매일매일 집을 나오는 시간, 지하철을 타는 위치, 버스를 타는 장소, 출근길에 사가는 커피 등에서 제 하루는 늘 같습니다. 오늘은 9시에 1번 칸을 타자, 내일은 10시에 2번 칸을 타자 이러지 않거든요.
그 익숙함(다른 말로 지겨운)이 흔들리는 때가 바로 여행입니다. 여행은 새로운 환경이고 거기서 완벽을 추구하니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한국에 와서 다시 출근할 때 지겹지만 편안함을 느끼는 저를 발견했습니다. 쿠알라룸푸르처럼 지하철 노선도에 대해 공부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강박을 가지지 않고 여행하는 날은 언젠가 오지 싶습니다. 시간, 돈, 제 삶에 대해서 여유를 가지면 되겠죠. 여행을 다녀오니 이젠 그게 궁금해졌습니다. 저는 언제쯤 '여유'가 생길지에 대해서요. 어쩌면 휴가도 휴가 자체가 행복한 게 아니라 온건히 내 시간이라는 여유를 가질 수 있어서 좋은 것인지 모릅니다.
빨리 그날이 왔으면 좋겠는데,
사실은 이미 할 수 있는데 못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결국은 마음먹기에 달렸겠지요.
저만 그런 게 아니길 바라며, 그리고 다른 많은 분들은 답을 찾으셨길 바라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