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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설팅, 꼭 필요할까

그 돈을 직원 인센티브로 썼다면

저는 종종 중고서점을 들립니다. 책을 많이 보는 편도 아닌데 책방가는 건 좋아합니다. 나중에 회사에서 잘리면 하루 종일 도서관에서 사는 꿈을 꿉니다. 그런데 최근에 꽤나 재미있는 책을 찾았습니다. 제목부터가 심상치 않았습니다. "컨설팅 절대 받지 마라" 라니!


실제 있는 책입니다. 유정식 저, 2007


무려 10년이 넘은 책인데도 이 책이 확 와 닿았던 이유는 저도 회사 생활하면서 처절하게 느꼈던 점이기 때문입니다. 신사업 쪽에 오래 있다 보니 직간접적으로 많은 컨설팅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지난 글인 "우리 장표 푸르게 푸르게"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제 업무용 컴퓨터 HDD 한구석에는 수많은 컨설팅사의 PPT 두루마리들이 잠자고 있습니다. 페이지가 막 몇 백 페이지이고, 그 안의 장표들은 한 장 한 장 현란하기 그지없습니다. 내용은 둘째치고 컨설팅 PPT 특유의 현란함 앞에 일반인들은 '우와~'하게 됩니다.


컨설턴트, 컨설팅사라고 하면 딱 연상되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해외 유수의 대학&MBA 출신, 외국어 능통, 억대 연봉,

단정한 양복, 말끔한 인상, 그리고 해결사 이미지.


단정한 양복, 말끔한 인상, 해결사 이미지...?



한글로 써도 되는 말도 굳이 영어로 써 가며, 오와 열을 맞춘 압도적인 장표를 넘기다 보면 일단 무슨 말인지는 몰라도 반박하기 어려운 자신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장표쯤 가서는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덮게 되죠. 제가 봐 왔던 컨설팅 결과물은 늘 이런 느낌이었습니다. 쉽게 설명할 말도 어렵게 말하는 것 같지만 역시 기분 탓이겠지요. 저보다 똑똑한 분들이 쓰는 보고서이니 그러려니 합니다.


주니어 시절 저는 컨설턴트들을 맹신했습니다. 네, 말 그대로 맹신입니다. 논리 정연한 언변, 체계적인 보고서, 현란한 영어까지. 제가 저글링이라면 저들은 질럿같아 보였습니다. 미네랄 25원짜리가 어디 토를 달까요. 그저 멋있어 보였습니다.  



 컨설턴트들이 고객사에 들어가기 전 상상도  (주니어 시절 제 눈에 보인 모습) 출처: 스타크래프트 2



그런데 언제부터였을까요.

시간이 지날수록 이상한 점들이 많이 보였습니다.




1. 정량화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정량화. 이에 대한 집착


헨리 포드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자동차를 보여주기 전에 사람들에게 빠른 교통수단에 대해 물어보면 다들 이런저런 말(馬)을 답한다고요. 고객들에게 물어서 답이 나올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혁신안은 답하는 이도 모르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제가 본 많은 컨설팅은 논리 전개를 위해 숫자를 사용했습니다. 그냥 사용한 게 아니라 일종의 강박마저 느껴지게 신봉했습니다. 온갖 통계와 유료 DB 자료들이 춤을 춥니다. 다만 순서가 뭔가 이상합니다. 가설을 세우고 이를 증명하는 숫자를 귀신같이 찾아 뒷받침했습니다. 보다 많은 숫자들 속에서 여러 가설을 보는 게 아니라요.


컨설팅뿐만 아니라 이러한 현상은 대학의 논문에서도 볼 수 있었습니다. 경영학을 비롯, 사회과학 논문의 태반은 주장에 대한 증빙을 위해 설문조사를 합니다. 설문을 설계하고 결과를 통계적으로 분석합니다. 마땅한 숫자가 없으니 숫자를 어떻게든 만드는 거죠.


살면서 수많은 설문조사 요청을 받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해서 수행한 건 손에 꼽습니다. 바빠 죽겠는데 대충대충 합니다. 물론 설문도 이를 거르기 위한 장치를 넣습니다. 그러나 설문 결과가 자연관찰의 실험보다 정확한 숫자가 나오진 않습니다.(숫자에 기반한 과학논문 형태를 무리하게 따라가다 보니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생각됩니다.) 첫 단추가 이러니 결과도 연구자가 해석하기 나름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컨설팅도 비슷했습니다.





2. 클라이언트의 니즈에 맞춘 컨설팅 답안


많은 경우에 컨설팅은, 정말로 문제의 답을 찾지 못해서 수행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근거와 권위가 필요한 임원들로 인해 시작되는 경우가 훨씬 많았습니다. 이런 식인 거죠.


(임원, 마음의 소리)

'A 문제에 대해 B 안을 주장하고 싶은데, 내 말이 맞다고 누가 이야기 좀 해주면 좋겠..

그렇지! 컨설팅을 해서 B 안이 맞다는 결과가 나오면 되겠다!'


이렇게 발주되는 컨설팅은 임원의 마음속엔 이미 답이 있습니다. 컨설팅 PM은 투입될 때부터 이에 대해 인지하고 들어옵니다. 답정너가 다른 게 아닙니다. 임원은 회사 내부에서 본인 주장에 힘을 얻고자 이용합니다.

"아 내가 컨설팅해 봤는데, 결론이 이렇게 나왔습니다! 합시다~" 이런 거죠.


어디서나 대활약 중인 답정너 여러분 (출처:인크루트)


컨설턴트들도 싫고 답답하겠지만 돈 받고 고객이 원하는 걸 해 준다는데 뭐가 문제일까요. 이렇게 회사 돈은 새어 나갑니다.




3. 투입시간에 맞춘 비용 청구


문제 해결 전과 해결 후를 비교하면 회사는 분명 더 나아져있겠죠. 나아진 만큼에 대해 보수를 받아가는 게 합리적일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본 대부분의 컨설팅은 투입 전에 기간과 비용에 대해 협의하고 시작했습니다.

아웃풋에 대한 보장이 안 되는 (혹은 안 하는) 거죠.


일정과 투입인력은 정해져 있으니 발주사 실무자는 시간이 지날수록 성격파탄자가 되어갑니다. 기간 내에 아웃풋이 잘 나오지 않으면 같이 깨질 판이니 당연합니다.


이런 방식이 아닌 후불형 (예를 들면 늘어난 매출액의 몇 %를 받는 식)도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기린이나 봉황 같은 느낌이랄까요. 저는 아직 본 적이 없네요.




4. 구체안의 부재


거창한 전략보고서를 많이 봐서일까요. 구체적인 실행방안보다는 '저 산으로 가야 하오' 식의 거창한 이야기만 많이 접했습니다. 좋은 의견이고 구구절절 옳은 지적입니다. 그러나 How에 대해서 땅에 내려와 이야기하는 컨설팅을 별로 보지 못했습니다. 다들 인공위성 마냥 성층권에서 이야기합니다.

높이 있으면 멀리 봅니다. 허나 정작 달려야 하는 건 땅 위의 우리들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달리는 방법은 땅 위의 사람들이 더 잘 알고 있었습니다.






대기업에서 컨설팅은 한번 할 때마다 몇 억씩 듭니다. 이 돈을 해당 문제를 잘 인지하고 있는 내부 직원에게 인센티브로 준다면 어땠을까.. 그동안 봤던 컨설팅을 생각해보며 종종 상상해봅니다.

장담컨대 컨설팅 비용보다 훨씬 낮은 가격에 좋은 답을 얻을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회사도 이 사실을 모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권위'의 값이랄까요.

"보아라! 이렇게 똑똑한 사람들도 내 말이 맞다고 하지 않느냐!"라는 근거가 필요하다 보니 컨설팅이 그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돌아보면 사회 곳곳에 이런 모습은 많이 있습니다. 뉴스 꼭지 말미에 대학교수님들이 출연하여 한 마디씩 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저는 기시감을 느낍니다.


우물 안 개구리로서 우물 속 하늘만 본 것일 수도 있으니 이 글은 철부지 아재의 한탄 글 정도로 봐주시면 되겠습니다. 세상은 넓고 훌륭한 컨설턴트들도 분명 많을 테니까요. 그래도 컨설팅사로 가는 돈이 좀 더 건설적으로 쓰인다면 어떨까 생각해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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