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러 왔으니 일만 봐야 하는데 사람도 봅니다.
야구 좋아하시나요? 저는 운동은 잘하는게 없던 몸치라 야구도 잘 몰랐습니다. 지금도 많이는 모릅니다. 굳이 야구에 대한 기억을 말하자면.. 중학교 2학년 때 관심이 많았다.. 정도겠습니다.
저는 부산에서 중학교를 다녔습니다. 남중이었는데 체육선생님이 롯데 팬이었습니다.
롯데가 이긴 날은 축구공 받아 노는 날이었고, 롯데가 진 날은 왜인지 모르고 모두 운동장을 돌고 기합을 받아야 했습니다. 야구의 야자도 모르던 제가 염종석이 잘 던졌는지 못 던졌는지가 관심사였죠.
갑자기 야구 이야기를 드리는 건 얼마 전 종영한 화제의 드라마 스토브리그 때문입니다. 다들 재미있게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말이 야구지 이 드라마는 오피스 드라마인데요. 야구단 운영진이 일하는 모습이 회사의 그것과 참 닮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재밌는 건 제 행태입니다. 회사에서 한껏 퇴근하길 희망하고 집에 왔는데 또 회사 이야기를 보고 있는 모습이라니.. )
드라마의 중심은 당연히 주인공인 백승수 단장입니다. 인터넷에서는 휴먼승수체(?!) 라고 해서 그의 명언이 많이 회자되고 있습니다. 말 자체도 멋있지만 저는 극 중 백승수라는 캐릭터가 가지는 비현실성 때문에 이 드라마가 더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되는 것 같습니다. 네, 비현실성입니다.
외모부터 비현실적이지만.. 백승수 단장은 조직에 실적으로 말합니다. 태도(회사에서 좋아하는 표현인 Attitude)로 말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 부분이 굉장히 흥미롭게 보였습니다. 우리 사회 속 성공한 사람들의 절대다수는 실적과 태도가 다 정말 좋거든요. 태도가 좋다는 말은, 철저히 조직이 원하는 태도를 보여준다는 뜻입니다.
인정받는 사람들은 대부분은 목표지향적이며 업무능력이 뛰어납니다. 성과를 잘 내기 위해서는 나만 잘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주변의 도움도 절실하죠. 그래서 태도가 공손해집니다. 말투도 부드러워집니다. 그게 자신에게 더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최소한, 태도로는 적을 만들지 않으려고 하죠.
반면 백승수 단장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회사에서 보는 태도가 아니죠. 살짝 소시오패스 느낌마저 들 정도입니다. 표정 변화가 적고, 말투가 딱딱합니다. 백단장의 말투는 글로 옮겨 두면 어색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실 생활에서 사용하면 엄청난 이질감이 느껴지죠.
장면 : 첫회식 장면. 운영팀원들이 삼겹살집으로 이동. 아무도 없다고 생각한 이세영이 단장에게 전화하라고 할 때
백승수 : (연락) 하지 마시죠
이세영 : 어.. 일찍 오셨네요
백승수 : 7시까지 아닙니까? (시계는 7시 2분)
이세영 : 아.. 네 저희가 늦었네요
본인 부임을 축하하는 회식자리에서 저런 대화는 전혀 상식적이지 않죠. 무표정한 얼굴로 저렇게 말하면 대부분은 화가 난 것으로 생각할 듯합니다.
백승수 단장의 말투가 특이한 이유는, 듣는 사람을 위해 표정과 억양을 조절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과장해본다면 연극무대의 배우가 연기할 때와, 대본을 그냥 책을 읽을 때의 차이라고 할까요.
대화를 할 때 우리가 웃거나 아이 컨택을 하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배려입니다. 사회적으로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인지하지 못하더라도, 이게 없는 커뮤니케이션을 해 보면 중요성을 깨닫죠. 백승수 단장의 말은 내용 전달에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필요한 정보를 담아 간결하고 명확합니다.
그러나 표정 변화가 없고, 우리가 '배려'라고 느끼는 부분들이 배제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백단장과 누군가가 대화를 한다면 열에 아홉은 당황할 것입니다.
많은 직장인들이 백단장을 멋지다고 느낀 이유는, 최근의 트렌드와 맞물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젊은 세대들은 회사와 사생활을 잘 분리하고, 업무에 집중하고 인간적으로 거리를 두길 선호하죠. 기성세대와 완전히 다른 카리스마와 리더십을 보이는 백단장 같은 사람과 일하고 싶어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제 경험상 백단장과 같은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한 회사와 그렇지 않은 회사가 존재합니다.
우리 직장인이 백단장을 멋있다고 느끼게 되는 건, 업무로 인해 감정 소모를 하고 싶지 않아서입니다. 건조해 보이지만 간결하고 당당한 태도의 커뮤니케이션이니까 멋있어 보이거든요. 회사 안에서 이런 사람을 보기 어려운 터라 더 멋있어 보입니다. 하지만..
회사가 스타트업이 아닌 한 백단장을 찾긴 매우 어려울 겁니다. 스타트업은 업무성과가 지상과제이기 때문에 업무 외에 감정적인 부분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건조한 커뮤니케이션이더라도 빠르고 정확하면 문제가 없습니다. 이는 성장하는 회사일수록 그렇습니다. 다시 말해, 바쁘면 다른데 신경 쓸 틈이 없죠.
이런 회사라면 백승수 단장과 같은 사람은 정말 유능한 인재입니다.
문제는 대다수의 회사는 그렇지 않다는 점입니다. 여전히 성과보단 관계를 중요시하다 보니 백승수 단장의 커뮤니케이션 방식은 환영받기 어렵습니다. 이해관계자 입장에서는 일 잘하는 놈은 어차피 많습니다. 나한테 얼마나 잘 웃어주고 맞춰주느냐가 훨씬 중요한 거죠.
그래서 권경민상무(오영세분)의 한마디 한마디도 날카롭게 파고듭니다. 이 드라마는 백단장과 권상무 두 사람의 대비가 꿀잼이었죠.
고강선(사장역): 어떻게 계약은 빨리 잘 마쳤네요. 백승수 저거 참, 싸가지가 없는데 일은 잘하네요.
권경민: 싸가지가 없는데 일은 잘한다. 쓰읍... 제 기준에서는 일은 잘하는데 차암... 싸가지가 없네요. 우린 그런 사람 필요 없는데.
저 역시 백승수 같은 사람을 회사 생활하면서 많이 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저 역시 백단장 같은 이 가 동료라면, 선후배라면 회사 안에서 어떤 느낌일까 생각해보면 또 다르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백단장을 마음에 품고 출근합니다. 티는 안내지만요. 저도 언젠가 리더가 된다면 백단장 같은 사람이 되고 싶네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