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이전 글 '나의 대기업 취업기'에서, 한번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통신 대기업에 입사하기 전, 어느 지방공장 회계직으로 취업했었다고요. 합격이 되고 바로 나온 터라 실제 근무는 1개월정도였습니다만, 건강보험증 상의 제 첫 직장인터라 나름 기억에 남습니다.
취업이 빨리 되어서 좋았습니다만, 지방도시의 공장 사무실은 낯설기 그지없었습니다. 강 옆 공장의 차가운 아침 공기, 3교대로 돌아가는 생산라인. 처음 하는 직장생활이라 긴장하고 하나하나 배워나가는 중이었죠.
대기업에 비해 많이 열악한 중소기업입니다. 그중 가장 충격적이었던 건, 다름 아닌 PC 소프트웨어였습니다.
2020년 오늘날에는 클라우드 기반의 구독형 오피스 365가 대세입니다.
그런데 2005년, 그 공장에서는 정품 SW를 쓰긴 써야겠는데 경비는 절감해야겠고 해서, 오피스 프로그램 중 '엑셀'만 사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워드, 파워포인트, 아래아한글.. 네,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실화입니다.
처음 PC를 받고 총무팀 과장님께 쭈뼛쭈뼛하며 제 PC에 엑셀만 있다고.. 잘못된 것 같다고.. 오피스 씨디 주시면 제가 설치하겠다고 말씀드렸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 과장님은 무심하게 "우리 회사는 엑셀만 써. 엑셀이면 다 되니까 잘 배워!"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처음에 이 분이 저를 싫어하시나 고민했더랬죠.
회사 공유폴더의 여러 양식들과 자료들을 보니 정말로 엑셀로 다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그 정도가 아닙니다. 회사에서 사용하는 거의 모든 양식들이 엑셀로 만들어져 있고 너무나 자연스럽게, 아무렇지도 않게 다들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아니 이게 이럴 수가 있나 싶을 정도로 희한한 (그리고 괴이한) 경험이었습니다.
세상에는 이런 능력자가 넘쳐납니다.. 이 화면은 엑셀입니다.엑셀로 윈도그림판을 만드시는... (출처:https://steemit.com/kr/@gbgg/feat)
그러나 인간의 적응의 동물입니다. 한 일주일 지나니까 이게 또 살살 익숙해집니다. 출력해서 보면 워드 문서인지 분간이 안 갑니다. 셀 크기를 조정해가며 온갖 문서를 만드는 스킬도 배웠습니다. 쓰다 보니, 이 정도 쓰면 다른 프로그램 말고 엑셀로 모든 걸 다 할 수 있겠다는 일종의 '납득'도 되었습니다.
한 달 남짓 다니고 회사를 옮기게 되었지만 그때의 그 경험은 제 뇌리에 강렬하게 남았습니다. 그렇지만 다른 회사 가서도 그럴 필요는 없었죠. 금방 그때의 기억은 잊어버렸습니다.
한창 회사 다니고 있을 때 스타트업 붐이 일어납니다. 아이폰과 함께 스마트폰 세상이 열리고, 설치형 S/W 위주였던 세상에는 온라인 기반의 생산성 Tool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에버노트, 구글 독스 등이 업무용 SW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입니다. 저는 신사업 개발이 직무이기도 했고 워낙 생산성 향상이라는 주제에 관심도 많았던 터라 나오는 족족 사용해 보았습니다. 앱스토어의 생산성(Productivity) 탭을 하루에도 몇 번씩 들락거리며 클릭해보기 바빴습니다. 이런 걸 쓰면 내 업무능력이 막 올라갈 것이라는 확신(이라고 쓰고 착각)이 들더군요. 에버노트 책도 보고, 이런저런 도구들에 대한 리뷰 블로그도 찾아보면서 공부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고 나만 앞서가는 느낌이랄까요. 도구 사용법에 심취해 가고 있었습니다.
스마트폰 세상이 열리며 생산성 툴들이 쏟아졌습니다
트렐로, 워크플로위, 에버노트, 원노트, 각종 마인드맵 툴... 모두 제가 몇 년간 열심히 연구(연구라는 표현이 맞습니다. 사용이 아니라 연구입니다) 해 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마냥 좋은 것은 아니라는 점을 슬슬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자료의 분산입니다. 예를 들어 에버노트에 좀 자료를 끄적이다가도, 사진자료는 구글 포토에, 간단한 메모는 구글 Keep에 저장하면서 혼란이 가중되었습니다. 원노트까지 쓰기 시작하면서 뭐가 어디에 있는지 찾는 것도 일이 되기 시작하더군요.
두 번째로 켜는 것, 즉 시동 그 자체가 허들이 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트렐로나 워크플로위는 좋은 툴입니다만 콘텐츠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최소의 단계들을 거쳐야 합니다. 브라우저를 켜고, 로그인을 하고 이런 단계들입니다. 생각이 떠오를 때나, 무언가를 찾아봐야 할 때 이런 단계는 꽤 큰 허들이 되더군요.
그러던 어느 날, 케이뱅크 프로젝트에 투입되어 열심히 일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2016년 말 정도였겠네요. 당시 제 카운터파트였던 부장님이 일하시는 모습이 제 눈엔 꽤 특이하게 보였습니다. 회의 때마다 본인이 나름의 기준으로 정리하시는 데 사용하시는 SW가 제가 모르던 것이었거든요. 웬만한 업무용 SW는 다 써 봤다고 생각했는데, 궁금해졌습니다.
부장님은 삼성카드 출신이셨고, 삼성그룹은 사내에서 훈민정음이라는 워드프로세서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훈민정음 패키지 안의 '훈민메모'라는 프로그램을 늘 사용해서 정리하고 계셨는데요. 개인적으로는 이해가 가질 않았습니다. 훈민정음은 삼성에서도 사용을 중단한 워드입니다. 가만히 지켜보다가 너무 궁금해서 개인적으로 여쭤봤습니다. 대답은 의외로 단순했습니다. '신입사원 때부터 써 와서 익숙해서'였죠.
거의 윈도 메모장 수준의 단순한 프로그램을, 지금 수많은 좋은 프로그램들이 나왔음에도 사용하고 있으신 것은 제게 꽤 큰 충격이었습니다. 부장님은 그 오래된 프로그램을 자유자재로 사용해서 업무에 정말 잘 활용하고 계셨습니다.
장인은 도구를 탓하지 않는다는 인터넷 명언이 새삼 생각났습니다. 그때부터였습니다. '연구'보다는 '사용'에 고민하기 시작한 것은. 그래서 그때부터 새로운 것을 배우기 보다는 손에 닿는 곳에 있는 툴들을 최대한 잘 활용해 보려고 노력합니다.
현재 제가 사용하는 생산성(?) 툴은 이렇습니다.
1. 구글 캘린더(일정) + 구글 테스크(할 일)
많은 분들이 다양한 일정관리 SW를 쓰시고 계실 겁니다. 저도 시중에 있는 것 모두 사용해보다가 이렇게 정착했습니다. 제가 어떤 작업을 하던 브라우저 하나는 띄우고 캘린더 화면을 두고 있습니다.
일정과 할 일을 분리해서 사용하는 분들이 많은데, 저는 통합해서 쓰는 게 맞다고 봅니다. 할 일 중에는 기한을 챙겨야 하는 것들이 꽤 생기거든요. 일정에 같이 표시해두면 좋습니다.
2. 메모장, 계산기, 스티커 메모
윈도 메모장과 계산기도 자주 씁니다. 오늘 중에 끝나는 메모들을 적는데 메모장을 사용합니다. 계산기야 설명할 필요 없을 듯하고요.
스티커 메모가 은근히 물건인데, PC를 여러 대 쓸 경우 MS 아이디 하나로 동기화가 되는 것 아시나요? 저는 참 잘 사용하고 있습니다.
3. 구글 Keep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은 모두 여기 보관합니다. 에버노트, 원노트에 있던 것들 모두 이쪽으로 보내버렸습니다. 기능이 굉장히 제한적인데 그래서 더 좋습니다. 에버노트와 원노트를 잘 활용하면 훨씬 더 강력합니다만 일반인은 그 정도까지 필요하진 않을 듯합니다. 아, 여행 준비를 할 때는 원노트를 활용합니다. 지도+글을 같이 볼 때는 원노트가 좋아서요.
본인의 기록 스타일을 잘 고민하셔야 하는데, 저 같은 경우 90% 이상이 텍스트였습니다. 그렇다면 구글 Keep으로 충분합니다.
4. 깊은 고민이 필요할 때만 마인드맵
마인드맵은 잘 사용하면 참 좋은 툴입니다. 다만 제가 사용할 때는 작은 문제도 너무 거창해지는 문제점이 있었습니다. 빠른 문제 해결이 중요한데 지나치게 거시적이 된다고 하면 적절할까요. 그래서 가려서 쓰는 편입니다. 제가 사용하는 마인드 맵은 알마인드(구버전)입니다. 해외 마인드맵도 좋은 게 많은데, 한글 폰트가 깨지는 경우가 많아서요.
과거 엑셀만 사용했던 공장 사무실에서의 경험이 왜 십수 년이 지나서 생각났느냐 하면, 새로운 툴을 연구하기보단 손에 익은 툴로 콘텐츠를 만들어 내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는 걸 이제야 알았기 때문입니다. 툴 사용법을 집중하다가 정작 중요한 콘텐츠에 대한 고민은 없었던 것이 지난 수년간의 저였거든요.
가장 단순한 메모장이라도 좋습니다. 툴보다는 그걸로 뭘 만들지 고민해 보시기 바랍니다. 시간은 늘 유한한데 저는 반대로 써 오고 있었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