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트해의 붉은숲 2
알료샤의 오른팔
라트비아 리가 국제공항.
김 선배는 강에게 공항에 마중 나와 기다리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 했다. 예정시간보다 2시간이나 연착을 했는데, 그 사람이 여전히 자기를 기다려주고 있을까? 여러 가지 생각들이 활주로에 날리는 눈발들처럼 어지럽게 흩날린다.
구소련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던 부끄러울 만큼, 변변한 여권검사나 세관검사도 없이 입국은 재미없을 정도로 싱겁게 끝난다. 바로 밖으로 나와 컨베이어 벨트 위로 실려 나오는 짐가방을 손으로 들자 그제야 본격적인 시작이라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든다.
한 남자가 ‘한국, 고려일보 강은철’ 이렇게 로마자로 또박또박 적은 흰 종이를 한 손으로 들고 있는 것이 보인다. 그는 강을 보자마자 먼저 다가와 서투른 한국어로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한다. 강은 멋쩍게 다가가 악수를 하려고 오른팔을 내민다. 그는 왼손으로 쥐고 있던 종이를 왼쪽 주머니에 대충 구겨 넣더니 그 왼손을 다시 내민다. 강도 어쩔 수 없이 왼손을 내밀어 악수를 한다. 오른팔 소매가 다른 편 주머니 속에 아무렇게나 구겨져 꽂혀있다. 우리의 어색한 시선을 풀어주려는 듯 남자 뒤에 서있던 여인이 환한 미소를 띠우며 다가와 서있는 이의 왼팔을 잡는다. 그제야 외팔이가 입을 연다.
“알료샤입니다. 미스터 킴한테서 연락 받았습니다.”
“네, 반갑습니다. 강은철입니다. 기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기는 제 부인 나타샤에요.”
먼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는 그녀의 손이 하얀 실크 손수건처럼 매끄럽고 곱다.
나타샤의 안내를 받아 공항 주차장에 대기하고 있던 흰색 중형차에 오른다. 차 안으로 몸을 들이밀자마자 열 몇 시간 동안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졸음이란 놈이 강의 정신을 짓누른다. 고개를 몇 차례 좌우로 흔들고는 창문을 조금 열어 바깥공기를 마신다. 동그랗고 파란 나타샤의 눈동자가 백미러 속에서 강을 지긋이 바라보며 말을 건다.
“라트비아는 처음이시죠?”
“네, 대학 때 유럽 배낭여행을 해본 적은 있는데, 이쪽 지역은 처음이에요.”
“오늘 아침까지도 여기는 큰 눈이 왔답니다. 눈이 올 때가 아닌데……. 아무튼 오늘 눈이 너무 와서 한 두 어 시간 공항이 폐쇄됐었어요. 그래서 비행기가 늦었을 겁니다. 그래도 내일은 날씨가 좋아야 할 텐데요.”
그 말 이후 다시 강이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려 들자, 어색한 침묵의 저주에서 강을 얼른 구하려는 듯 나타샤가 성급하게 다시 말을 건넨다.
“한국도 여기처럼 눈이 오나요? 라트비아에서 눈을 처음 보시는 거죠?”
바위사막
알료샤가 라트비아를 떠나 바위사막에 온 것은 1979년 크리스마스 즈음이었다. 흰눈 대신 누런 모래를 온몸으로 맞으며 그곳에 온 사람들 중 아프가니스탄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이는 아무도 없었다. 낙하산부대 교육을 받은 알료샤와 다른 병사들은 앞으로 낙하산을 탈 일이 전혀 없을 거라는 사실 역시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소대장의 이름은 스체니친이었다. 나중에 들어본 바에 의하면 그는 키르키즈스탄에서 그곳까지 소대를 직접 이끌고 하늘과 맞닿을 만큼 높은 산을 몇 개나 걸어서 이동해 왔다고 했다. 전설과도 같은 그 말을 증명하기 위함인지 다부진 체격을 과시하기 위해 언제나 웃통을 벗고 다녔고, 구릿빛으로 달아오른 피부색은 두려울 정도로 붉었다.
그곳에 도착한 후 며칠 동안 그들을 맞이한 생활환경은 생각 이상으로 좋았다. 먹고 싶은 것은 마음껏 먹을 수 있었고, 심지어 밀이나 보리보다 고기가 더 많을 정도였다. 하지만 먹는 것을 빼놓고는 여러 가지 조건이 상상 밖이었다. 대낮의 온도는 40도에 육박했지만, 밤에는 영하 40도로 떨어졌다.
평화롭던 어느 날 난데없이 소나기가 퍼부었다. 고향에서 보던 소나기가 아니었다. 빗줄기는 산중턱 어디엔가에서 누런 물길을 모아서 한꺼번에 아래로 흘려보냈고 삽시간에 모든 지대가 침수되어 캠프 전체가 물살에 휩쓸려 내려갈 지경까지 이르렀다. 잠시 진정이 되고 막사를 정리하자 이번엔 땅이 흔들렸다. 지진이 난 것이었다. 난리 속에 알료샤의 부대는 보급품마저 잃어버리고 말았고, 몇 명의 동료들이 목숨을 잃었다. 황량한 돌산 한가운데에서 생존하는 법을 제대로 배운 이는 아무도 없었다.
사나흘 쯤 지나자 갑자기 공항 근처에 엄청난 폭격소리가 들렸다. 스체니친 대위는 병사들을 모아 어딘가로 이동했다. 알료샤에게는 베이스캠프에 남아 무기고를 감시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그는 밤새도록 무기고 앞에서 공포에 떨며 밤을 지새웠다. 폭격소리는 그칠 줄을 몰랐고, 폭격이 떨어지는 먼 산 뒤쪽은 수백 대의 조명을 밝혀놓은 듯 이글거렸다. 희멀건 불빛이 유령처럼 지평선 전체를 품고 있는 것 같았다.
폭격은 이튿날 새벽이 되어서야 잠잠해졌다. 스체니친 대위는 전날 데리고 갔던 인원보다 훨씬 적은 수의 사람들만을 데리고 복귀하였다. 동료들은 그 희멀건 불빛 속을 배회하다가 정말 유령이라도 목도한 듯 차에서 내리자마자 바닥에 힘 없이 쓰러졌다.
쓰러진 대원들 대신 알료샤는 허겁지겁 차에 올라 무작정 이동해야했다. 초토화된 마을에서는 꽃 같은 소련과 아프간의 젊은 시신이 한데 엉켜 굳어져 있었다. 그 중에서 소련군의 시신은 따로 골라내고 아프간 병사들은 짐처럼 실어 어딘가로 보내졌다. 군복에 묻은 그 꾸덕꾸덕한 냄새는 아무리 빨고 문질러도 평생 코에서 없어지지 않았다.
그 날 이후부터 음식의 양과 질이 급격하게 떨어졌다. 한동안 공항 주변이 아무런 폭격도 없이 잠잠하긴 했지만, 전쟁터라는 것 하나만으로도 극심한 공포는 시도 때도 없이 그를 괴롭혔다. 사회주의라는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 그 모든 것을 군말 없이 견뎌내야 했다. 그런 희생은 조국의 심장과 맞닿은 이곳에 미국이 자본주의 괴뢰국가를 건설하여 가족과 형제들에게 총구를 겨누지 않도록 하기 위한 숭고한 행위였다.
스체니친 대위는 뱀을 잡는 일을 참으로 잘 했다. 어디에서건 길다란 나뭇가지만 구할 수 있으면 그걸 날카롭게 잘라 뱀의 목을 겨누고 단숨에 숨을 끊었다. 음식의양이 턱없이 부족해지는 판국에 그가 잡아다 주는 뱀은 생명을 이어주는 최고의 양식이었다. 용처럼 커다란 뱀을 다리로 누르고 당장이라도 한방에 삼킬 듯이 하악대는 그 짐승을 잡는 모습은 마치 용을 무찌르는 그레고리우스 대성인 같아 보이기도 했다.
스체니친 대위는 부대원들에게 한 달만 지나면 다시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 장담했다. 그러나 그레고리우스 대성인의 언약은 두 달이 지나도록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성인과 같았던 거의 지위는 순식간에 땅으로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