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작소설] 발트해의 붉은 숲 1
[1943년 3월 16일 라트비아에는 독일 무장친위대의 자원부대가 창설되었다. 자원무장친위대는 2차 대전 중 나치독일에 점령당한 나라들에는 흔히 있었던 무장단체지만 자그마치 11만 명의 젊은이들이 입대한 라트비아는 과히 유럽 전체에서 최대 규모였다. 히틀러의 후방부대를 자처한 이들은 전쟁이 끝나갈 무렵 라트비아 서부 해안가에서 끈질기게 벌어진 전투에 참여하여 2차 대전을 지루하게 끌고 간 주인공들이기도 했다.]
적송숲
1945년 겨울, 라트비아 서부 해안도시 리에파야.
축복 받은 크리스마스 전날. 아이바르스는 적송(赤松)숲의 붉은 어둠 속 눈보라를 헤치고 달리고 있었다.
조금 전만 해도 그는 태어나면 발디스라는 이름을 짓기로 약속한 사내아이를 임신하고 있는 아내 마리아와 마지막 식사를 함께 하고 있었다. 독일은 분명히 패망할 것이다. 그리고 라트비아를 해방시키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어쩔 방도가 없었다. 리에파야에 사는 모든 젊은이들은 예외 없이 동원명령이 내려졌고, 장차 라트비아의 독립을 돕겠다는 독일군의 약속은 부질 없어 보여도 그나마 심연의 붉은 어둠 속에서 끌어 안아야하는 한 가닥의 희망줄 같은 것이었다. 그날 적송숲 마을에는 눈송이만큼 많은 생이별이 눈물로 날렸다.
“전쟁은 곧 끝날 거야. 그러면 발디스와 평화의 공기를 마시며 살게 되겠지.”
아이바르스가 입술을 열어 자기의 허파에서 공기를 끌어와 밖으로 꺼낸 말이지만 자신 역시 그 공기의 울림이 만들어내는 소리를 믿을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함박눈이 밤을 하얗게 만들던 긴 겨울의 패망, 모래무지에서 뿌리를 내리고 자라는 적송 숲을 차지한 붉은 여름. 그리고 날아온 독일의 패전 소식. 살아서, 불구가 되어, 혹은 죽어서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는 적송숲의 남자들. 모든 이들이 살아서 죽어서 그렇게 다시 리에파야에 돌아와 가족들과 포옹을 나누는 데도 아이바르스로부터는 아무런 소식도 없다.
일말의 희망으로 전쟁터로 끌려간 이들의 기록을 불태우고 황급히 자리를 떠나버린 독일. 봄의 신 지에도니스가 조국의 초원에서 미소를 지을 무렵 태어난 핏덩이 발디스를 안고 적송숲에 나와앉아 사랑하는 연인을 기다리는 마리야. 아이바르스는 뿔이 우람한 사슴이 되어 돌아오려나, 아니면 저 산 너머 떡갈나무로 웅장하게 자라서 다시 오시려나.
독일이 떠난 자리를 다시 소련의 붉은군대가 들어와 메꾼다는 소식이 들렸다. 독일이 점령하기 전 라트비아를 유린했던 소련의 공포정치에 대한 기억이 남아있던 이들에게, 그 붉은 이들이 다시 돌아오면 적국인 독일에 협조했다는 명목으로 그들을 더 악랄하게 통치할 것은 뻔한 것이다.
아, 숲 너머 붉은 까마귀들아. 너희들 날개소리가 이 땅을 범하려는 악한 전사들의 창칼 소리 같구나. 마리야는 소나무 숲 너머 까마귀들이 푸드득 거리는 소리만 들려도 붉은군대가 몰려오는줄 알고 가슴을 저몄다.
많은 이들이 고향을 버리고 발트해 금모래밭에서 배를 타고 허우허우 바다를 건너 탈출하기 시작했다. 해안가에 살던 마리야의 가족들 역시 그가 호박(琥珀)바다를 건너 스웨덴으로 도망할 수 있도록 배를 마련해주었다. 하지만 마리야는 떠나려 하지 않았다.
바다 절벽에 앉아 안개로 실을 짜고 동트는 햇살로 옷을 기워 황금마차를 타고 돌아오는 님을 기다리고 있으리. 그대로 발트해안가의 모래언덕이 되어도 좋으련.
소련의 붉은 깃발이 라트비아에 드리우자 많은 이들이 정치범으로 몰려 모래밭에 아름다운 생명을 흩뿌렸고 멀고 먼 동토의 땅으로 사라져 버렸다. 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것이 천우신조였을까. 마리야는 그 매서운 동토 시베리아의 폭풍을 간신히 피할 수 있었다.
어린 발디스는 붉은 통치가 진행되는 동안 학교든 어디서든 독일군의 편에서 싸우기 위해 눈보라를 헤치고 떠난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없었고, 마리야는 조국을 위해 산화한 남편을 위해 꽃 한 송이조차 놓을 수 없었다. 그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회오리바람 같은 핍박과 차별 뿐. 성스러운 로무바의 숲, 가슴 벅차게 요동치는 다우가바의 물결이, 그 땅에 사는 이들의 안위 따위는 한 뼘의 관심도 두지 않는 이들에게 내던져진지 수 백년.
그 거대한 세력은 마침내 붕괴했지만, 붉은 깃발을 들고 적송 숲에 들어온 이들은 여전히 적송 우거진 모래무지에 남아 마리야가 기사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백합을 헌화하는 길목을 가로막았다.
상처 받은 적송이 흘리는 핏물인양 마리야 같은 순결한 여인들 마음에 맺힌 눈물이 꾸덕꾸덕 굳어버린 딱지인양 누른 호박조각이 파도에 실려오는 발트해에 마리야가 기다리던 그 늠름한 아이바르스는 모습 끝내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