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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토끼

발트해의 붉은 숲 7

by 자까

늦게 잠들었나 싶었는데 일어나 보니 새벽 여섯 시다. 동트기를 준비하는 햇살과 파란 북유럽의 하늘이 만나 리가 시내는 마치 창포물로 머리를 검은 것 같다. 호텔 앞으로 시원하게 흐르는 푸르른 강물. 호텔 앞은 봄을 맞을 준비를 하는지 팬지와 자줏빛 데이지꽃을 화단에 옮겨 심는 손길로 분주하다. 그 위로 펄럭이는 붉은색과 하얀색이 어우러진 깃발.


약속한 시간, 호텔 로비에 알료샤가 와있는 게 보인다. 강은 어제의 일이 기억에 남아 왼손을 내민다. 악수가 매끄럽게 성공한다. 기분이 좋다. 말 없는 알료샤는 어제 이야기 한 대로 호텔 근처 러시아 학교로 나를 이끈다.


복도에서 보이는 아이들의 모습은 우리나라와 별 다를 바가 없다. 어디서나 떠들고, 산만하지만 쾌활하고, 동양인을 처음 보는 듯 신기한 시선으로 쳐다보는 아이들. 좀 나이를 먹은 듯한 아이들이 모인 곳에는 어김없이 보이는 담배꽁초들. 알료샤를 비롯한 다른 교사들은 그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눈치다.


밝은 베이지색의 원피스를 입은 나타샤가 수업하고 있다. 책상 위에는 라트비아어로 써진 책이 펼쳐져 있다. 세포의 구조가 자세하게 드러난 그림이 있는 것을 보니 아마 생물을 가르치고 있는가 보다. 라트비아어는 러시아어식 키릴 문자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러시아어와는 확연히 차이가 드러난다. 아이들 앞에 펼쳐진 라트비아어 교과서, 그러나 강의실을 공명하는 것은 나타샤의 러시아어다. 한국에서 기자가 온 탓에 더 신경이 쓰이는지 유난히 자세에 집중을 쓰는 아이들. 그래서 러시아어로 받아 적는 아이들의 연필 소리가 더 사각거린다.


수업 중에 학생들과 교사를 대상으로 인터뷰를 해도 좋을지 궁금해진 강이 알료샤에게 살짝 묻는다. 그 이야기를 들은 나타샤는 흔쾌히 허락한다.


“지금 라트비아어와 러시아어로 같이 수업을 진행하시는 거 같네요.”

“네, 맞아요. 현재 라트비아 교육개혁정책 때문에 라트비아어 비중을 점차 늘려가고 있지요. 거의 모든 과목을 라트비아어로만 진행해야 돼요. 그래서 라트비아어 교과서를 사용하지만, 정작 설명은 러시아어로 해요.”

“그럼, 아이들은 라트비아어 수업을 잘 따라올 수 있나요?”

“그런 아이들도 있지만 대부분 아이들의 라트비아어 실력은 아직 그렇지 못해요. 그리고 우리 선생님들도 마찬가지구요. 전 라트비아어를 모국어로 구사하는 편이지만 그렇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는 라트비아 정부의 지침을 따르기 위해서 쇼를 하고 있는 셈이죠. 라트비아어 책을 펴놓고, 러시아어로 설명을 하는 우스꽝스러운 상황이요.”


나타샤의 모국어가 라트비아어였다니 사뭇 놀랍다. 강과 나타샤가 영어로 이야기를 하는 사이, 아이들은 그 이야기를 곧잘 알아듣는 듯 귀를 쫑긋 세우고 경청하고 있다. 아니면 영어로 이야기를 하는 생물선생님의 생소한 모습이 신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강은 그 중에서 맨 앞줄에 앉은 한 여학생에게 녹음기를 내밀면서 눈짓으로 인터뷰를 해도 되겠느냐고 묻는다. 그 여학생은 환한 미소로 대답한다.


“학생은 라트비아 정부의 교육정책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요?”


그 아이는 반듯한 영어로 또박또박 대답한다.


“전 반대합니다. 전 라트비아에서 태어났지만, 가족이나 친척, 친구들 중에 라트비아 친구는 하나도 없어요,


그래서 라트비아어를 쓸 일도 없지만, 전 러시아 사람이기 때문에 라트비아어를 배우고 싶은 생각도 없어요.”

그 옆에 앉아있던 남학생이 굵은 목소리로 이어간다.


“라트비아 사람들은 우리 러시아가 다시 예전처럼 자기들을 지배할 거라고 생각을 하고 있어요, 우리를 무서워하기 때문에 러시아어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려는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지지 않을 거예요.”


나타샤와 아이들은 다시 책으로 고개를 돌려 수업을 이어간다. 강은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수업광경을 카메라에 담는다. 교실에 붙은 여러 안내문들, 점들이 찍힌 라트비아어 광고판과 간판들이 가득한 눈 덮인 거리. 주변을 점령하고 있는 언어와 문화권에 어울리지 않는 문자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아이들. 양떼들 사이에 길을 잃고 들어온 흰 토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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