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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고은 변호사 Apr 14. 2022

성범죄 피해 대응의 첫걸음, 성폭력범죄 개념 이해하기②

성범죄 피해자, 그들이 당당한 세상을 바라며

지난 칼럼에서는 성폭력 범죄의 기본구조와 추행의 의미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번 칼럼에서는 두 가지 사례를 통해 '강제'의 의미와 '준(準)'의 의미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사례 1. 강제

늦은 저녁 야근을 마친 피해자 A는 지친 몸을 이끌고 지하철에 올랐다. 하지만 오늘도 만원인 지하철은 앉을 자리는커녕 발 디딜 틈조차 쉽게 내놓지 않았다. 간신히 손잡이를 잡은 A, 조금만 참으면 집에서 쉴 수 있다고 자신을 달래고 있는데, 누군가 자신의 엉덩이를 갑자기 만지는 것이 아닌가. 좁은 공간에서 어쩔 수 없는 신체접촉이 아닌, 분명 누군가가 주무르듯 만진 것이다.


과연 가해자는 어떤 범죄로 처벌될 수 있을까? 지난 칼럼에서 보았듯 어떠한 행위가 성폭력 범죄에 해당하려면 먼저 간음, 유사간음, 추행 이 세 가지 중 하나에 해당해야 한다. 가해자는 피해자를 간음하거나 유사간음하지 않음은 명백하다. 하지만 가해자는 피해자의 신체에 성적인 접촉을 한 것이므로 추행을 하였다.


다음으로 가해자는 강제, 준, 위계, 위력 중 하나의 수단을 이용해야 한다. 여기에서 가해자가 이용한 수단은 강제이므로 가해자는 강제추행죄로 처벌된다. 지난 칼럼에서 강제의 의미는 가해자가 피해자를 저항하지 못할 정도로 심하게 폭행하거나 거부할 수 없을 정도의 협박을 하는 것이라 하였다. 사례에서 가해자는 갑자기 A의 엉덩이를 만졌을 뿐 피해자를 저항하지 못할 정도로 폭행하거나 협박하지는 않았으므로 일반적인 강제의 의미에 해당하지 않는다.


하지만 법원은 이렇듯 가해자가 기습적으로 추행한 경우에는 강제의 개념을 확장하여 유형력의 대소강약을 불문하고 강제에 해당한다고 한다. 간음과 달리 추행은 선행하는 폭행이나 협박 없이 갑작스럽게 일어날 수 있는데 이렇게 강제의 의미를 확장하지 않으면 추행을 한 가해자를 처벌할 수 없는 경우가 많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범죄는 특히 대중교통수단이나 물놀이 시설 등 사람이 많이 모이고 신체접촉이 쉽게 일어나는 장소에서 잘 벌어지는데, 이러한 가해자의 기습적인 추행은 모두 강제추행에 해당한다.


한편 특별한 경우에는 기습적인 유사간음도 발생할 수 있다. 안마사가 안마하는 척하면서 갑자기 자신의 손가락을 피해자의 성기에 집어넣은 경우나 찜질방에서 잠자고 있는 피해자의 항문에 갑자기 손가락을 집어넣은 가해자에 대해 법원은 모두 강제를 인정하여 유사강간죄로 처벌하였다.


사례 2. 준(準)

수능시험을 마친 고등학생 친구들이 노래방으로 향했다. 술도 마시며 한참을 신나게 놀고 있었는데, 화장실을 다녀오겠다는 B가 사라졌다. 한참 동안 찾아도 B를 발견할 수 없었던 일행은 B가 술에 많이 취하였기 때문에 크게 걱정하였고, 결국 경찰에 신고하였다. 경찰은 휴대전화 위치 조회를 통해 B가 한 모텔에 있는 것을 확인하였고, B가 있는 방에 들어갔는데 방 안에는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성과 상의를 입고 있지 않은 B가 발견되었다. 남성은 우연히 노래방 건물 앞에서 술에 취한 B를 만났고, 대화를 나누던 중 B가 쉬고 싶다고 하여 합의 하에 모텔에 온 것이라 했다. 이후 B의 옷을 벗기고 가슴을 만지며 키스를 한 것은 맞지만 강제로 위와 같은 행동을 한 것은 아니라고 했다. B는 자신의 이름을 말할 수는 있었지만, 상당히 술에 취해 있어 정상적인 대화가 어려웠다. 한편 CC(폐쇄회로)TV를 통해 B는 비틀거리기는 하지만 스스로 걸어서 모텔방에 들어갔음이 확인되었다.


이 가해자는 어떠한 범죄로 처벌받게 될까? 가해자는 합의 하에 위와 같은 행위를 하였다고 주장하지만, 만취한 고등학생인 B가 길에서 처음 만난 30대 남성과 그 정도의 성적 행위를 하는 것에 진지하게 동의했다고 보기는 어렵고 가해자도 B가 술에 많이 취하였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가해자는 B가 이미 술에 만취해 항거할 수 없는 상태임을 이용하였다. 가해자가 폭행이나 협박으로 피해자를 항거불능의 상태로 만드는 것이 '강제'라면, 이미 항거불능의 상태에 빠져있음을 이용한 것은 강제라는 수단을 사용한 것과 별반 다를 바 없으므로, 강제에 '준'한다고 할 수 있다.


이에 가해자에게는 준강제추행죄가 성립한다. 법원은 위 사례에 대해 술로 인해 의식을 완전히 잃게 되는 패싱아웃(passing out⋅의식상실)은 물론, 정상적인 행동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블랙아웃(black out⋅기억상실)에 있어서도 피해자가 술로 인해 단지 기억을 못 하는 것을 넘어서서 만취 상태로 항거불능으로 볼 수 있다면 준강제추행죄가 성립한다고 보았다.


한편 술에 취했지만 만취하지 않아 의식이 있었음에도 수치심이나 당혹감에 저항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대학생이 동아리 여행 중 술을 마시고 자려고 하는데 가해자가 피해자의 신체를 만진 경우, 친구와 그 친구의 남편과 함께 술을 마시다 잠을 자려고 하였는데 친구의 남편이 피해자를 간음한 경우다. 당시 피해자들이 술에 만취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준강간죄나 준강제추행죄를 그대로 적용하긴 어려웠다. 그렇다고 강간죄나 강제추행죄를 적용할 수도 없었다. 강간·강제추행을 적용하기 위해 필요한 폭행·협박 등이 없었기 때문이다. 법원이 택한 방법은 준강간죄나 준강제추행죄의 불능미수범이었다.


불능미수란 결과 발생이 불가능하나 그 위험성이 있는 경우 미수범으로 처벌하는 것을 말한다. 법원이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법리상 가해자를 처벌할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적용한 법리였다. 하지만 이 판결에 대해 "실제 범죄가 발생한 경우에도 '미수범'으로 보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비판도 있다. 구체적으로 간음이 이루어져 피해자의 성적 자기결정권이 침해된 이상 불능미수범이 성립할 여지가 없다는 취지였다.


다음 칼럼에서는 위계와 위력, 그리고 보호감독관계에 대해 살펴보겠다. 




이 칼럼이 성범죄 피해자들이 자신들의 피해 사실을 신고하는데 필요한 용기를 심어주고, 나아가 자신들에게 주어진 법적 권리를 통해 피해 회복을 하는데 '힘'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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