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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랭 여행기(2):뜨거운 오후, 조용한 도시의 첫인상

사람은 없고, 풍경만 있는 도시

by 뮌헨 가얏고

점심을 마치고 다시 길을 나섰다.


오후 3시 30분쯤, 목적지 도시에 진입하자마자 묘한 적막감이 감돌았다.
이곳 역시 길가엔 사람 한 명 보이지 않았고, 상점과 건물들은 창문까지 굳게 닫혀 있었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고요한 풍경에 살짝 당황했지만, 곧 우리가 묵을 호텔이 눈에 들어왔다.



과거 어느 귀족의 저택을 개조한 듯한 고풍스러운 건물이었다.

‘제발 에어컨이 빵빵하기를...’ 속으로 기도하며 체크인을 했다.
원래 예약한 방이 아닌, 조금 작은 방으로 배정받았다. 이유를 물으니 우리가 쓰려던 방은 꼭대기층이라 너무 더울 거라는 설명이 돌아왔다.


기분이 썩 좋진 않았지만, 에어컨 약한 벨포르 호텔방에서 하루를 보내고 났더니, 물랭에서는 넓고 멋진 방보다 시원한 방의 유혹을 뿌리칠 수 없었다.


방은 그런대로 맘에 들었다. 생각보다는 넓었다. 차가운 마룻바닥의 느낌도 좋았다.

더위에 지쳐 있던 터라, 시원한 공기가 스며들자마자 스르륵 잠이 쏟아졌다.


우리가 묵은 호텔


잠시 눈을 붙이고 깨어나 시내 투어에 나섰다.

텅 빈 거리와 낡은 건물들이 의외로 운치 있게 다가왔다. 사진으로는 온전히 담기지 않는, 그런 고요하고 깊은 아름다움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장이라도 더 담고 싶어 열심히 찍었다. 벨포르에서 느꼈던 아쉬움이 조금은 사라지는 듯했다.


뜨거운 햇살이 쏟아져 걷는 것조차 힘든 날씨였지만, 문득 눈에 띄는 장면이 있었다. 바로 근처 라 메종 마르탱(La Maison Martin) 정원에서 남녀 그룹이 모여 보디 워크(body work) 운동을 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걷기조차 버거운 더위 속에서, 이열치열이라는 말이 절로 떠올랐다. 그런 날씨에도 열심히 몸을 움직이는 모습에 감탄하며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시내를 걷다 보니 예쁜 청록색 상점이 눈에 띄었다. 초콜릿을 파는 가게였는데, 요즘 내가 푹 빠져 있는 색감이었다. 아쉽게도 이 가게 역시 문이 닫혀 있었다. 그러고 보니 거리의 많은 상점들이 굳게 닫혀 있는 것을 깨달았다. '프랑스는 월요일에 쉬나?' 혼자 중얼거리며 씁쓸하게 돌아서야 했다. 알고 보니 프랑스는 월요일에 휴업하는 가게나 식당이 많다고 한다.



물랭에서 만난 시간의 흔적들


우리가 묵은 호텔 근처에는 메종 망탱(Maison Mantin), 물랭 대성당, 그리고 라 말 코피(La Mal Coiffee), 안 드 보제 박물관(Musée Anne de Beaujeu) 등 다양한 역사적 명소들이 모여 있었다. 비록 짧은 1박 2일의 일정과 닫힌 문들로 인해 내부를 자세히 둘러보지는 못했지만, 밖에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 도시의 깊은 역사를 느낄 수 있었다.




메종 망탱은 19세기 건축 양식을 고스란히 간직한 저택으로, 1905년 소유주가 사망하면서 박물관이 되었다고 한다. 당시 생활상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과거로 시간 여행을 하는 듯한 독특한 경험을 할 수 있다고 한다. 비록 가이드 투어를 통해서만 관람이 가능해 아쉽게도 발길을 돌려야 했다.


물랭 대성당은 시내의 랜드마크답게 웅장한 위용을 자랑했다. 14세기에 수도원과 교회로 시작되어 특히 15세기와 16세기에 제작된 스테인드글라스와 '성모 대관식' 삼면화가 유명하다고 한다. 성당 주변의 역사적인 거리도 함께 둘러보며 다양한 건축 양식을 감상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도시 어디에서나 볼 슈 있었던 대성당


마음 한편이 아려왔던 곳은 바로 라 말 코피(La Mal Coiffee)였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에 의해 점령된 물랭에서 유대인들을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등으로 보내던 곳이자, 레지스탕스 대원이나 정치범들이 고통받았던 감옥이었다는 설명을 읽으니 숙연해졌다.



뜨거운 햇살 아래, 아쉬움이 남는 산책


나무 그늘 하나 없는 뜨거운 햇살을 그대로 맞으며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작년 여름 한국에서 사 온 UV 차단 양산을 가져오는 건데…'

타들어가는 듯한 작열하는 날씨에 후회감이 밀려왔다. 정말 '작열하다'는 표현이 딱 어울리는 날씨였다.


물랭의 구시가지(Historic Quarter)는 자갈길과 오래된 목조 가옥들이 어우러져 중세 시대로 돌아간 듯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아름다운 옛 건물들과 시가지가 호텔 근처에 있어 걸어서 충분히 둘러볼 수 있는 점은 정말 좋았다. 하지만 너무 더운 날씨 탓에 도시의 매력에 충분히 빠져들지 못한 점이 아쉬웠다. 한적한 걸 좋아하지만, 너무 고요하니 어딘가 삭막하게 느껴졌다.



비록 짧은 시간 동안 많은 것을 보고 경험하진 못했지만, 물랭은 닫힌 문과 더위 속에서도 충분히 매력적인 도시였다. 언젠가 다시 방문할 기회가 생긴다면, 문이 활짝 열린 물랭의 진짜 매력을 온전히 느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식의 설렘으로 향한 물랭의 저녁 식사.
멋진 분위기의 맛집에서 만난, 예상치 못한 불편함.
다음 편에서는 그 아쉬웠던 저녁 이야기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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