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은퇴식을 앞두고
어제, 대전 친정 교회에서 마지막 주일 예배를 드리고 왔다. 1987년 개척한 교회로 내가 네 살, 동생이 세 살 때였다.
엄마는 당시 천안에서 나름 잘 나가는 피아노 학원 원장이었다. 천안의 유지 자녀들이 다 다닐 정도였으니 말이다. 아버지는 가난한 신학생이자 전도사였다. 아버지가 엄마에게 기도하는데 자꾸 대전으로 마음이 간다며 대전으로 가자 이야기했을 때 엄마는 아는 사람 하나 없곳으로 간다는 자체가 마음이 불편했단다.
피아노를 가르치며 번 돈으로 아버지의 신학대학원비를 충당했고 일을 하는 엄마로서 돈 버는 기쁨도 있었는데 이 모든 걸 포기하고 아브라함처럼 떠나라고? 그래서 가려면 혼자 가라고 단호하게 거절의사를 밝혔는데 그 거절 이후부터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진 것.
50명이 넘던 원생들이 이런저런 이유를 들며 하나둘 씩 빠지기 시작해 학생 수가 손에 꼽을 정도로 줄어들었던 것. 참 기가 막히면서도 마음 아픈 순간이었지만, 신적 개입 없이는 쉽게 일어날 수 없는 일인 것을 이게 바로 하나님의 부르심이구나. 깨달았다고. 그렇게 엄마는 자의 반 타의 반 학원을 접고 아무 연고도 없는 대전으로 아빠와 함께 내려갔다. 피아노 학원을 정리하고 남은 돈과 그동안 벌어들인 수입은 고스란히 네 식구가 머물 전셋집과 지하실 교회 보증금으로 사용되었다고.
대전 동구 용전동에 위치한 지하실 교회. 그곳에서 첫 6개월은 가족끼리 단출히 예배를 드렸다. 말 그래도 개척멤버 없이 성도 0명으로 시작한 교회였다. 그러던 어느 날 한남대학교에 다니던 한 여대생이 전도되었다. 어린 시절 내 기억 속에 그녀는 맑은 피부와 싱그러운 미소를 자랑했다. 이후 그녀의 남동생도 자연스럽게 교회에 나오게 되었는데 청년부 시절을 지나 목회에 뜻을 품고 목회자가 되었다. 작은 교회에서 일어난 아름다운 기적이었다.
그 당시 27살에 처음 예수님을 영접한 청년이 있었다. 예수님을 알기 전에 술을 참 좋아하던 청년이었다.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 그의 삶은 100프로 달라졌다. 교회를 참 사랑했고 헌신했다. 교회에서 만난 어여쁜 간호사 자매와 아버지의 주례로 결혼을 했다. 20년가량의 세월이 흐르고 그는 이 교회의 첫 장로로 세워졌다. 그의 큰 딸은 부모님처럼 우리 아버지의 주례로 착한 남자를 만나 결혼을 했고 얼마 전에 쌍둥이 부모가 되었다. 40년이라는 시간 속에서 한 가정이 뿌리내리고, 그 세대가 이어졌다. 세대를 아우르며 주례를 하는 기쁨을 아버지는 누리셨다.
비가 많이 내렸던 어느 날, 지하실 교회에 물이 차올랐다. TV에서는 계속 홍수라며 떠들어댔다. 빗방울이 세차게 내리는 가운데 부모님이 양동이로 물을 퍼낸다며 급하게 교회로 뛰어가셨다. 나는 동생과 집에 둘이 남겨졌는데 부모님이 안전하게 돌아오기만을 계속 기다렸었던 그 어린 마음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때의 믿음이란 정말 나무를 붙잡고 기도하는 야성의 믿음이었다. 우리 부모님 세대는 정말 그랬다.
부모님은 새벽 4시 30분만 되면 곤히 자는 우리를 두고 살금살금 침실을 빠져나가 교회로 향하셨다. 오전 5시 새벽예배를 위한 발걸음이었다. 부모님의 온기가 사라진 이부자리는 그 어린 나를 각성하게 만들었다.
덩그러니 동생과 남은 이불속에서 이성은 사라지고 오로지 아빠 엄마를 봐야겠다는 마음에 신발을 신고
교회로 냅따 뛰어갔더란다. 그렇게 뛰어간 교회에서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창문 문틈 사이로 빼꼼 부모님을 확인하면 다시 잠이 몰려왔더라지. 혼날까 봐 문을 열고 들어가지는 못하고 그렇게 계단에 앉아 꾸벅꾸벅 졸며 예배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개척교회다 보니 첫 몇 년은 항상 재정이 쉽지 않았다고 한다. 쌀독에 쌀이 똑 떨어진 날도 있었다고. 그때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좌절하지 않고 공급자이신 하나님을 향해 두 팔을 뻗어 기도 하셨단다. 기도가 끝나고 때마침 우체부로부터 건네받은 편지 한 통을 열었는데 전도사 시절부터 알고 지냈던 집사님이 목사님 생각나서 보낸다며 짧은 편지와 함께 돈이 들어있었다고. 고아들을 먹여 살린 조지 뮬러가 주님의 공급을 위해 기도했을 때 기적이 일어난 것처럼 말이다. 그런 크고 작은 기적들이 비일비재했다.
놀이터에서 아이들을 모아놓고 그림판에다 정성껏 오린 그림들을 뗐다 붙였다 하며 복음을 전하시던 부모님. 색깔로 예수님의 피와 지옥 천국을 표현한 '글 없는 책'은 항상 주머니에 들어 있었다. 아버지는 기회만 닿으면 복음을 전하셨다. 학창 시절 집과 학교가 가까웠던 나는, 하교 후 친구들과 함께 집에 우르르 몰려가 라면을 끓여 먹곤 했다. 그때마다 아버지 눈에 띈 아이들은 복음을 듣고 영접기도를 해야 했다. 그땐 그게 왜 그렇게 창피하던지.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목사님 딸이니 당연하다며 받아들여 준 친구들이 참 고맙다. 그중에는 실제로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다니게 된 친구도 있다.
어제 아버지의 마지막 설교를 듣는데, 지난 세월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교회가 세워진 지 10년 차쯤이었던가. 내가 중학교 3학년 때 세 들어 살던 건물 뒤편 땅을 매입해서 공사가 시작됐다. 엄마는 매일 인부들 점심을 먹이기 위해 교회로 향했다. 공사가 시작되었을 무렵 건물주로부터 전세금을 돌려줄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단다. 이미 땅을 매입하고 공사가 시작된 후였다. 무를 수도 없었다. 만약 땅을 사기 전에 그 이야기를 알았다면 교회를 지을 생각조차 할 수 없었을 거라며 모든 것은 하나님의 적절한 타이밍으로 이루어진다는 후일담을 들려주시곤 했다.
연고 하나 없는 대전에 오셔서 무려 40년을 같은 자리에서 성도들과 교회를 섬겨오신 부모님. 그렇게 부모님과 함께 수십 년의 세월을 함께한 성도들은 아버지 앞에서는 담담한 듯 보였다.
"정말 다음 주 주일부터는 뵐 수 없는 건가요? "
마지막 주일설교가 끝나자 한 사람씩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인사를 건넸다. 손을 부여잡기도 하고 포옹을 하기도 하고 눈시울이 붉어지고. 30년 넘게 계속된 주일의 풍경인데 같은 교회 건물과 사람들 속에서 부모님만 사라져 가는 것 같달까. 서로 주고받는 눈빛 속에 담긴 세월과 시간들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아버지는 마지막 설교에서 말씀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살며, 풍성한 은혜를 누리는 삶을 살자."
1987년, 성도 0명으로 시작한 작은 지하실 교회였지만 목회자도 배출되고 자립까지 이루기까지의 모든 과정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고백하셨다.
나의 부모님은 한 영혼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분들이셨다. 사람 수에 연연하지 않으셨고 정말 한 사람 그 한 영혼에 큰 무게를 두고 깊이 사랑했다. 천안에서의 안정된 삶을 내려놓고 기회만 닿으면 예수님의 사랑을 복음을 전하려 애썼던 삶.
참된 크리스천이 어떤 삶인지를 부모님을 통해 배웠다.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 하신 예수님의 발자취를 가까이에서 목도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할 따름이다. 그분들의 발자국을 내가 얼마나 따라갈 수 있을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은혜의 자리를 눈으로 보고 마음에 새길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참 감사한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