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담백 때묻지 않은 순수한 나를 마주하다.
엄마는 내가 국민학교 시절 매일을 작성한 일기를 버리지 않았다. 이사할 때마다 20년도 더 된 그 일기장들을 가장 먼저 챙기곤 했단다. 꼭 이 일기를 모아서 내가 나중에 낳을 아이에게 보여준다는 엄마만의 깊은 뜻이었다. 그 시절엔 매일 일기를 써서 제출하는 게 숙제였다. 하루가 끝나가는 날 의무감으로 작성하는 일기였고 자발적으로 쓰는 날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일기장을 제대로 열어본 건 이번이 처음이다.
시댁에 인사를 드리고 친정으로 건너온 나는 진정한 긴 연휴를 맞이했다. 온몸의 긴장이 풀려 버린 탓인지 무얼 먹어도 소화가 제대로 되지 않아 딱히 활동적으로 움직일 수도 없었다. 신랑도 일이 생겨 나와 함께할 수 없었기 때문에 오로지 나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생겨났기 때문일까. 신랑과 떨어져 친정에서
내가 쓰던 방에 몸을 누였을 때 책꽂이에 꽂혀 있던 일기장 하나를 집어 들어 무작정 읽기 시작했다.
몸은 지쳐 있었으나 정신만은 아침햇살처럼 말짱했기에...
주로 4~5학년 때의 일기였는데... 참 솔직했었구나 나.
일기를 읽는데 기억이 오롯이 되살아 나는 느낌이었다. 비디오테이프를 다시 감아 다시 재생시키는 듯했다. 한 글자 한 글자씩 천천히 읽어내려 가는데 까맣게 잊고만 있던 그 시절의 일들이 우두둑 저 먼 우주에서부터 쏟아져 내 안으로 들어오는 것만 같았다.
분명 선생님이 검사하는 일기임을 알았을 텐데도 내 일기장은 부끄러울 정도로 솔직했다.
내 안에 두려움부터 미래에 대한 열망, 외모적인 콤플렉스부터 친구들과 싸우고 화해한 일들까지..
그 날 일어났던 임팩트 있던 일이라면 선생님이 어떻게 생각하실까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처럼 연필을 들고 거침없이 써 내려간 흔적들이 보인다. 간간히 인스타그램을 운영하며 몇 번씩 글을 썼다 지웠다 하는
지금의 내 모습과 는 정말 판이하게 다른 <나>를 마주한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그 시절의 나는 홍정욱의 7막 7장이라는 그 두꺼운 책을 (물론 엄마의 교육방침에 따른) 완독 했었다. 그 책을 다 읽고 그가 얼마만큼 진실되게 책을 썼을까 하는 조금의 의심도 없이 <홍정욱>이 걸어온 인생의 발자취를 존경하기에 이르렀다.
일기장 속의 나는 책을 읽고 느낀 감동을 친구들과 공유하고 나누고 싶었지만 그럴만한 친구가 없었던 것 같다. 돌아보면 5학년이 읽기에는 버거운 책이 맞았는데 엄마는 내가 그 책을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믿고 계셨단다. 그 덕에 난 또래들보다 성숙했고 인생이 진지하게 다가왔었다.
그래서인지 일기장에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다짐들과 인생에 대한 나만의 철학으로 가득하다.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는 친구들도 일기장에는 현재의 일처럼 존재했다. 짝꿍이었지만 맨날 싸웠던 정*석, 뒷자리에 앉았다는 차*, 선영이, 재영이, 지연이 등등 눈부시게 밝고 환했던 그 시절이 잠들어 있던 내 잔잔한 기억을 깨웠다.
그들은 다 어떻게 지낼까. 몇몇은 결혼했다는 얘기를 건너 듣기도 했었다. 흐르는 대로 살다 보니 그 친구들은 저 멀리 기억의 창고에 담아 던져뒀었는지도 모르겠다.
선생님 이름도 까맣게 다 잊었는데 일기장에 선생님 이름도 등장한다. 내가 가장 존경했던 선생님은 3학년 때 담임 이셨던 이효선 선생님 이라는데.. 난 그 선생님 얼굴이 전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보다는 내가 좋아했던 남학생 윤** 얼굴만 뚜렷하다.
그때는 정말 매일 일기를 쓰는 게 왜 숙제여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자의든 타의든 반 강제적으로 썼던 일기가 왜 중요했는지 일기를 읽어보니 알겠다. 그 시절 매일 썼던 일기는 글쓰기의 자양분이 되었고 그날 하루의 감정이 쏟아지는 창구였기 때문에 아이의 정신건강에도 매우 이로웠다 생각한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속 마음을 일기장을 벗 삼아 털어놨었기에 그 어느때보다 건강하고 자유로웠을 것이다.
타임머신을 타고 1990년대로 훅 날아갔던 그 시간들을 돌아보니 늘 두꺼운 가면을 쓰고 사회 생활을 하는 것 같은 지쳐버린 나를 본다. 다시 일기 쓰기를 시작해 볼까 싶다. 그 누구에게도 말 하지 못한 내 안에 꽁꽁 숨겨둔 이야기들을 풀어놓다 보면 지금 보다는 좀 더 여유로운 시각으로 인생을 바라볼 수 있게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