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새끼가..."
아버지 입에서 거친 말이 나왔고 손은 높이 들린 채 내 뺨을 향하고 있었다. 나도 아버지를 향해 "왜! 때리게?"라며 반항을 했다. 아버지는 한참을 나를 노려보시다가 끝내 때리지 않았다. 아버지는 한 번도 나를 때리지 않았지만, 그날은 맞은 것 이상으로 많이 아팠다.
25살의 나이에 첫회사에 입사했을 때 잦은 실수로 윗사람들의 불신을 샀고, 자주 듣는 선배님들의 거친 언행으로 스트레스가 심했다. 회식이 있는 날은 2차 이상까지 가는 일도 잦아 속이 떡이 될 때가 많았다. 몸과 정신이 온전치 않았다. 집에 가려면 군자역에서 내려 아차산으로 가야 하는데 지하철에서 졸음을 못 이기고 도봉산역까지 간 적도 다반사이다. 술에 취해 지갑, 핸드폰 등의 소지품도 잘 잃어버렸다. 뿐만 아니라 스트레스가 심할 적에는 새벽에 장염 증상으로 응급실에 입원했다가 출근하기도 했다. 생전 안 걸리던 신종플루까지 걸렸고 휴가 일수를 깎여가며 집콕도 했다. 이리 터지고 저리 터지고 사건만 있는 1년 차 회사 생활이었고, 나는 내가 하는 실수에 스스로 긴장하고 있었다.
새벽 4시쯤 잠이 깨면 출근 스트레스에 더 이상 잠이 오지 않아 그날 할 일을 미리 점검하다가 출근하기도 하고, 노트북으로 실수할 것 같은 것들을 미리 작업하기도 했다. '어떻게 잘할까'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욕을 먹지 않을까'를 생각했던 초반의 회사생활이었던 것 같다. 주말이 오면 빨리 지나가니, 주말이 오는 것도 불안할 정도로 자존감 또한 많이 내려가 있었다. 하루는 회사차를 몰고 출장을 다녀오다가 너무 늦어 회사에 차를 세우지 못하고 집 근처에 차를 댄 적이 있다. 다음날 차를 몰고 나가기 위해 아침에 나섰을 때 아무리 동네를 돌아도 회사차가 보이지 않는 상황을 마주했다.
나는 너무 당황했다. 가뜩이나 일도 안 풀리고 욕이란 욕은 다 먹고 있는데 회사차가 갑자기 사라지다니 미치고 팔딱 뛸 일이었다. 아버지도 출근하기 전에 함께 찾아봤는데, 차는 온 데 간데없었다. 이대로 회사를 그만둬야 하나 하는 생각으로 출근을 하는데, 너무 다행스럽게도 회사차가 견인됐다는 연락을 받았다. 나는 차가 견인된 곳에 찾아가 회사로 발송되는 견인봉투도 내가 받고 견인비용도 내가 냈다. 회사에는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회사에서는 이 이상으로 욕을 먹다가는 더 내려갈 곳도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똥줄 타는 하루를 보내고 퇴근을 해서 집에 있는데 마음이 좋지가 않았다. 우울했다. 저녁 8시쯤 아버지로부터 전화가 왔다. 아버지는 살짝 취해있었는데, 대뜸 "아들, 너 회사에서 자꾸 그러면 안돼 이놈아."라고 첫마디를 내뱉었다. 나는 순간 화가 났다. 아버지를 포함해 우리 가족에게 회사를 다니며 힘든 일을 한 번도 얘기하지 않았는데, 힘든 일은 묻지도 않고 '너 그러면 안돼'라니 서운하고 분한 감정이 올라왔다. 처음에는 감정을 억누르며 아버지 얘기를 듣고 있었는데, 그날따라 아버지는 전화로 계속 잔소리를 하셨다.
"알았어! 그만해 좀!"
나는 아버지의 전화를 끊었다. 아버지의 무뚝뚝한 언행이 나를 더 힘들게 했다. 그날 밤 아버지는 술에 취해 집에 들어왔고 불을 끈 채 누워있는 나를 굳이 나와보라며 방 밖으로 끌어내셨다. 아버지는 본인이 아들에게 전화하는데, 그렇게 전화를 끊냐며 나를 다그치셨다. 나는 모든 상황이 다 싫었다. 나는 한 번도 아버지에게 대들지 않았는데 그날은 강하게 대들었다.
"아빠는 인생에서 실수하거나 잘못한 것 없어?"
"아빠는 회사 다닐 때 실수 안했어."
"아니, 아빠도 아빠 인생에서 실수 했잖아."
그 말이 아버지의 상처를 강하게 눌렀다. 아버지가 스스로 생각하는 잘못은 경제적 사정으로 우리 가족이 시골에 오래 머물러야 했던 일이었다. 아버지는 한 번도 보이지 않던 눈물을 내게 보였고, 많이 놀라셨는지 방으로 다시 들어가라며 나를 본채 만채 했다.
나는 아버지와의 대화를 원했다. 하지만 내 감정도 복잡했다. 대학생이 될 때까지 아버지와 많이 떨어져 지냈고, 아버지는 홀로 지내느라 나와 대화를 하는 게 서툴 수밖에 없었다. 이해해야 하는데 나도 힘드니 아버지의 무관심해 보이는 말투가 싫었다. 나는 그냥 '내가 잘하고 싶은데 지금 잘 안되고 힘들다'라고 아버지에게 얘기하고 아버지를 안아드렸다. 그리고 다음날 우리 부자는 아무렇지 않은 듯 화해했다.
"아들, 오므라이스 해줄래?"라며 아버지가 먼저 손을 내밀었고 나는 아버지에게 오므라이스를 해주었다. 그걸로 그 일은 없는 듯 지나갔다. 아버지가 나의 힘들었던 신입사원 시절을 알게 된 건 그 일이 있은 후 4년이 지난 후쯤이었다. 당시 에세이 형태의 짧은 글을 게재한 적이 있는데 그때 신입사원 때 겪었던 아픔과 그 아픔을 겪어내는 일화를 썼고, 아버지 또한 그 일을 알게 되었다.
나와의 술자리에서 아버지는 그 얘기를 먼저 꺼내셨다.
"아들, 왜 얘기 안 했니?"
"뭐 나만 그런가. 우리 가족 다 힘든 상황들 버텨내느라 아무도 힘든 거 얘기 안 하고 살았잖아."
"그랬니. 아빠가 아들 글 보는데 마음이 아프더라. 아빠가 그때 아들 상황을 잘 몰라줘서..."
"이미 지나간 일이고, 지금이라도 알아줘서 고마워. 나도 아빠 혼자 살 때 힘들었던 거 이제야 알았잖아. 지금이라도 아빠 힘들었던 거 알아서 다행이다. 앞으로 좋은 추억 많이 쌓으면 되지 뭐."
내가 쓴 시 중 <어른이 된다는 건>이라는 시가 있다. 때로 예기치 않게 일찍 어른이 되는 상황이 생긴다. 나도 그랬고, 지금을 살아가는 누군가도 상황이 여의치 않아 일찍 어른이 되기도 한다. 그걸 볼 때 나는 마음이 아프다. 그런 상황에서는 어른이 된다는 이유로 주변에 아픔을 얘기하지 못할 때까 많다. 시간이 지나면 그게 서로에게 아픔이 되기도 한다.
어른이 된다는 건
어른이 된다는 건
상처를 입어도
모른 척 덮는 일이 많아진다는 것
곪은 상처가 끝내 터져
아픔에 신음해도
다른 사람들도 버티고 산다며
끝내 외면하는 일
철이 든다는 것이
아플 때 소리 내지 말라는 의미란 걸
진작 알았더라면
난 좀 더 늦게 철이 들었을 텐데
지금의 나는 너무 어른 같지 않으려고 애쓴다. 어른인 척 살다 보면 바보처럼 참는 법을 배운다. 아이처럼 농담도 건네고, 아픔과 슬픔 또한 농담처럼 웃어넘긴다. 힘들면 힘들다고 주변에 얘기한다. 아버지의 안부도 자주 묻고 힘든 일은 없는지 자주 이야기를 건넨다. 그런 질문과 표현 만으로도 애정이 생기고, 한주의 피로가 조금은 덜어진다. 어른이었던 우리가 서로를 만나면 아이가 된다. 야구를 보고, 영화를 보고, 노래방을 가고 게임으로 밥 내기도 한다.
"아빠 이번해는 너무 레벨이 높은 해야. 배우는 것도 많은데 엄청 힘들 때도 있어."
"아들, 힘들지? 그래도 예전처럼 잘하다 보면 좋은 일 생기겠지. 아들은 잘하고 있어."
"그럼. 아빠 아들 잘하고 있지! 10분 있으면 야구 시작한다!"
"아들, 얼려놓은 맥주랑 과자 꺼내야지!"
달콤한 하루가 또 한 번 선물처럼 스며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