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주 전에도 과일 보낸 건 안 비밀...
"어제 노트북 보냈고 영양보충하라고 과일 보냈다 노트북만 보내나 좀 더 보내나 가격이 같아서..."
엄마의 문자에 한숨이 푹 나온다. 짜증이 올라온다.
엄마... 택배 금액 똑같은 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우리 집은 어릴 때부터 형편이 좋지 못했다. 초등학교 때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에게 김치를 나눠줬는데 그중에 한 명이 나였다. 이것 말고도 감면받거나 학교에서 뭘 주거나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 김치가 가장 기억에 남는 이유는 그 큰 박스를 안고 집까지 들고 왔기 때문이다.
그때는 초등학교 4학년이라 왜 받는지도 모르고 김치 받은 친구들이랑 즐겁게 김치를 들고 집에 왔다. 당시에 살던 동네가 부모님이 바쁘시거나 형편이 어려운 가정이 많은 동네였어서 그런지 가난해서 창피하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었다. 나랑 노는 친구들 집도 우리 집이랑 비슷했으니까.
그날 김치 가져왔을 때 아빠는 학교에서 여기까지 그 박스를 들고 온 내가 귀엽고 기특했는지 엄청 웃으면서 좋아하셨다.
"우리 딸 학교에서 김치 받아왔어? 김치 장학생이네~"
나는 뭣도 모르고 아빠가 좋아하니까 김치 장학생이 좋은 거라고 생각하고 뿌듯해했었다.
이후에도 우리 집은 계속 형편이 어려웠다. 태어나서 한 번도 형편이 어렵지 않았던 순간은 없었다. 하지만 옷이 없다던가 갖고 싶은 걸 못 가져서 서러웠다던가 그런 기억은 없다. 내가 아들 둘 아래의 막내딸이기도 했고, 엄마가 그런 거 느낄 겨를 없이 다 해줬기 때문이다.
우리 엄마는 사 남매인데 귀한 늦둥이 막내딸로, 첫째 이모와 나이 차이가 10살 넘게 났다. 그러다 보니 엄마는 하고 싶은 것도 다 하고 사랑도 많이 받고 자랐다. 어린 시절 살아온 삶의 방식과 부모의 양육태도는 자녀의 성격과 행동에도 다 흔적이 남는다고, 우리 엄마는 60살이 된 지금도 그런 삶의 흔적이 남아있다.
그런데 우리 집은 가난하다. 그래서 그게 문제였다.
어릴 때 내 기억을 돌아보자면, 엄마가 이불이나 옷을 사 와서 아파트에 살 때는 아파트 비상구나 계단, 주택에 살 때는 담벼락 아래에 숨겨두고 들어가는 걸 아주 많이 봤다. 아빠가 알면 된통 다툼이 나기 때문이다.
아빠는 어릴 때부터 가난한 집의 맏아들이었다. 그래서인지 아니면 원래 성격인지 굉장히 이성적이고 물욕이 없다. 가진 것 안에서 없으면 없는 대로, 있으면 있는 대로 살지, 꼭 필요한 게 아니면 갖고 싶다고 사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러니, 안 그래도 세 남매를 키워야 해서 경제적으로 빠듯한데 엄마가 자꾸 뭘 사 오니까 아빠 입장에서는 황당하고 이해가 안 될 수밖에...
엄마는 늘 '다섯 식구가 먹고살려면 어쩔 수 없다, 엄마니까 자녀들한테 해주고 싶은 거다, 너희 아빠가 요즘 물가를 몰라서 그런다'라고 하셨고 나는 엄마의 말을 믿었다. 우리 집 경제상황을 잘 몰랐고, 엄마랑 함께 하는 시간이 더 많았고, 엄마한테 화내는 아빠가 무서울 때도 있었으니까.
근데 점점 나이를 먹고, 아빠랑도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고 우리 집 경제가 어떤 상황인지를 알게 되니까, 우리 삼 남매의 생각은 완전히 바뀌었다. 아빠 말이 맞았다.
엄마 이거 왜 샀어?
엄마 이건 뭐야
엄마 이거 왜 보내
엄마 나 이거 필요 없다고.
오히려 엄마가 뭘 해주거나 사주면 해주지 말라고 하는 게 우리의 모습이었다.
엄마가 베풀어준 마음을 우리가 거부하거나 만류할 때면 엄마는 늘 대체 어느 집인지 모를 다른 집 이야기를 꺼냈다.
"다른 집은 비싼 거 먹고, 좋은 거 입는데 엄마가 우리 아들딸도 좋은 거 해주고 싶어서 그러지"
우리 삼 남매와 아빠가 정말 열심히 이렇게 하면 안 된다며 엄마를 말리고 때로는 말이 안 통해서 화내기도 하는 시간이 있었기에 엄마가 아주 잡다한 거 사는 건 많이 줄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엄마가 포기 못하는 몇 가지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과일이다. 오늘 나를 한숨 쉬게 하는 것도 바로 그놈의 과일이다.
우리 집은 늘 집에 과일이 있었다. 한 종류도 아니고 늘 두 종류는 꼭 있었다. 과일 떨어질 날이 없었다. 엄마가 늘 과일을 사뒀기 때문이다. 그리고 엄마는 지금도 가족 여행 갈 때면 바리바리 짐을 싸들고 오는데 과일은 꼭 세 종류정도 사서 들고 오신다. 그럼 우리 삼 남매는 한숨을 쉰다. 물론 나도 과일 좋아한다. 과일이 집에 있으면 좋다. 근데 형편에 맞춰 살아야 하는 거잖아!
난 과일이 이렇게 비싸다는 걸 대학 가서 처음 알았다. 집에서 독립해나와 혼자 생활하다 보니 '아 과일이 이렇게 비싼 거였구나' 하는 걸 알게 된 거다.
매일 집에 과일 있던 게 익숙했던 나지만, 내 시중에 가진 돈과 과일의 금액을 생각하니 자연스레 과일 없이 사는 삶이 됐다. 과일이 먹고 싶어도 참는 날도 있어야 했고, 가끔 여유 좀 되는 날엔 과일을 사 먹었다.
하지만 우리 엄마는 참지 않지.
아빠랑 둘이 사는 본가에서 과일 사 먹는 거까지는 엄마 인생이고 엄마 돈이니까 그렇다 쳐도, 독립해서 타지에 사는 우리 삼 남매한테도 자꾸 과일을 보냈다.
오늘처럼 내가 본가에서 택배로 받아야 하는 물건이 있을 때 그 물건만 보내는 게 아니라 꼭 과일을 같이 보내는 거다. 이제 좀 나아진 거지, 심할 때는 나한테 말하지도 않고 과일만 보낼 때도 있었다.
과일이 그 지역에서만 나는 것도 아니고... 택배 보내는 거 생각하면 내가 집 앞 마트에서 사 먹는 게 더 저렴한데도 엄마는 꼭 그랬다. 보내지 말라고 해도 보냈다. 그러니 우리 삼 남매도 점점 엄마가 택배 보내는 거에 화가 날 수밖에...
나도 어릴 때는 '엄마 마음이라는 게 자식한테 평생 뭘 다 해줘도 부족하고 미안한 거라는데 우리 엄마도 우리 사랑하니까, 더 해주고 싶은데 못 해주니까 미안해서 늘 뭘 해주려고 하는 거겠지.'라고 이해하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우리 엄마만 엄마가 아니다. 내 친구들 엄마도 엄마인데, 이야기 들어보면 우리 엄마는 유독 과했다. 보내줄 필요가 없는데도 보내주고, 받는 우리가 원치 않는데도 보내줬으니까.
우리 삼 남매가 이제 모두 성인이 됐고, 직장생활을 하고 있어서 부모님 생활이 좀 나아지겠지 싶었건만, 여전히 아빠는 알뜰살뜰했고 엄마는 새는 바가지와 같았다. 지금은 엄마의 해맑은 경제관념에 아빠도 두 손 두 발을 다 든 상태인 것 같다. 여전히 아빠는 알뜰하게 아끼고 모으며 노후 준비 중이었고 엄마는 현재를 사는 중이었다.
이런 엄마이다 보니, 오늘 노트북과 함께 보냈다는 그 과일은 나한테 고마운 엄마가 아니라 여전히 나를 답답하게 하는 엄마로 느껴졌다.
과일 값이 중요한 거지, 뭐 좀 더 넣어도 택배비 똑같은 게 중요한 게 아닌데... 엄마의 마인드는 우리랑 접근방식 자체가 다른 것 같다. 이럴 때면 가슴에 돌이 앉은 것처럼 갑갑하다.
"엄마, 과일 좀 그만 사"라는 말은 더 이상 엄마한테 먹히지 않는다. 그 어떤 영향도 없다. 마음 같아서는 더 세게 말하고 싶은데 세게 말해봐도 엄마는 달라지지 않았고, 그 말은 한 내 마음만 불편했기에 카톡에 답장을 썼다 지웠다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다가 이렇게 보냈다.
"아이고 어머니..... 택배값 올라가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 과일이 돈이잖아요.. 과일 비싸 과일이 금값이라고 내 친구들 집에서도 안 먹고 못 먹는다는데... "
일부로 엄마가 자꾸 언급하는 다른 집을 언급해서 '우리 집보다 형편 좋은 다른 집도 비싸서 과일 안 사 먹는다더라, 우리도 자제하자.'라는 메시지를 전했건만....
"공주 건강이 돈보다 귀해요
식초에 30초 정도 담갔다가 깨끗이 헹궈먹으렴^~^"
답답하다. 대화할수록 내 속만 더 답답해지는 것 같다.
엄마의 사랑이 담긴 표현을 들었는데 기쁘기보다 답답하다.
좋게 보면 돈 없어도 자식한테 다 해주고 싶은 게 부모 마음이니 감사히 받으면 나도 참 좋을 텐데 내가 감사하다고 하고 좋아하는 반응을 보이면 엄마는 내가 좋아하는 줄 알고 분명 더 많이 보내기에 나는 늘 엄마한테 표현도 자제할 수밖에 없다.
엄마 나는.... 독립한 자녀들한테 필요하지 않은 거 자꾸 보내줘서 빚 늘어나는 엄마보다, 독립한 자녀들 알아서 살게 두고, 두 분의 인생에 집중하면서 합리적인 경제생활하는 엄마가 더 좋아요.
엄마가 챙겨주고 보내주면 그럴수록 오히려 내 마음만 더 힘들어 결국 다 빚인데 왜 자꾸 감당 못할 신용카드로 과일을 사서 보내는 거야..
나도 엄마한테 "엄마 나 과일 좀 보내주세요~"라고 말하는 날이 오면 좋겠어 나도 엄마한테 마음껏 표현하고 마음껏 기뻐하고 딸처럼 편하게 어리광 부리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