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금일, 월급날이 아닌 책임의 날

잔금일 최악의 시나리오

by 인생의 마루

중개업 초창기에는 매일 잔금일이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던 적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야무진 꿈이었죠.


대체로 중개사무소에서는 잔금일에 중개보수를 받습니다. 그래서 중개사에게 잔금일은 월급날 같은 의미를 갖습니다. 하지만 여느 회사의 월급날처럼 마냥 기다려지기만 하는 날은 아닙니다. 잔금 전에 반드시 해결해야 할 일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계약당사자와 잔금 시간을 정하고, 매매계약이라면 필요한 서류를 준비하도록 안내해야 합니다. 등기 업무를 맡길 법무사와도 약속을 잡아야 하죠. 중개사는 공과금이나 관리비, 그 밖의 체납 사실이 있다면 납부 여부를 확인합니다. 필요하다면 직접 검침을 하고 정산금액을 확인해주기도 합니다. 매수자에게는 정산 명세를 알려주고, 당일 열람한 등기부를 확인하도록 합니다.

필요서류가 빠짐없이 준비되었는지 법무사에게 확인한 뒤 잔금을 송금합니다. 입금이 확인되면 미리 준비한 영수증에 매도자가 도장을 찍고, 영수증을 나누어 갖습니다. 이 모든 과정은 보통 30분 전후로 마무리됩니다.


그러나 같은 날 여러 집의 이사 일정과 잔금일이 맞물리면 작은 차질 하나가 예상치 못한 상황을 불러오기도 합니다. 그러면 잔금 시간은 몇 시간씩 늘어질 수 있습니다.


제가 겪었던 최근 최악의 잔금일은 이랬습니다.

중개한 집에 입주하기로 한 임차인 A는 자신의 집을 임대한 후 보증금을 받아 잔금을 치르려 했습니다.

그런데, 이사 당일 임차인 A 집에 입주하기로 한 임차인 B가 자신이 살던 집주인에게서 보증금을 받지 못해 임차인 A에게 잔금을 치르는 못할 상황이 벌어진 겁니다.

따라서, 임차인 A도 제가 중개한 곳의 잔금을 치르지 못하게 되었죠.


저는 상황파악이 되면서 머릿속이 하얘지기 시작했습니다. 잔금시간은 다가오는데 방법은 없고, 약속한 잔금 시간이 지나면서부터 세입자의 독촉전화가 이어졌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저는 “조금만 기다려달라,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하고 했습니다.


임차인 A가 늦게나마 잔금을 받았지만, 이번엔 임대인이 연세가 있으셔서 은행 업무를 직접 처리해야 했는데, 미리 가서 대기하고 있었음에도 점심시간과 맞물려 직원의 부재로 한 건 처리하는 데 30분 이상 소요되는 막막한 상황이 이어졌습니다.

다시 한 시간 이상을 기다린 끝에 보증금 반환을 힘들게 마무리했습니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할만한 건 이사 나가는 임차인은 신규 아파트로 이사해서 이 같은 일이 반복되지는 않았다는 점입니다.

결국 오전에 마무리하려던 잔금은 무려 3시간이 지나서야 겨우 끝낼 수 있었습니다.


잔금일은 중개사에게 단순히 보수를 받는 날이 아니라, 수많은 변수와 긴장 속에서 거래를 완성하는 날입니다. 때로는 예기치 못한 상황이 겹쳐 최악의 시나리오가 펼쳐지기도 하지만, 그 과정을 무사히 마무리했을 때 안도감과 성취감이 생기기도 합니다.

중개업을 하며 깨달은 것은, 잔금일은 ‘월급날’이 아니라 ‘책임의 날’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책임을 다했을 때 비로소 진정한 보람도 있는 거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