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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딘도 Nov 14. 2023

다이소에서 빨랫비누를 샀다

지우고 싶은 모든 것들

어제 그렇게 차 문을 쾅 닫고 내린 뒤로 냉전시대가 찾아왔다. 퇴근하고 회사 정문에 남편을 기다리는데 그는 나를 본체만체하곤 휙 지나쳐 가버렸다. 얼른 그 뒤를 졸졸 따라가다가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어 방향을 휙 틀었다. 그게 기분이 나빴던 걸까? 또다시 냉전이다. 이놈의 냉전시대. 이제는 지긋지긋하다.


남편은 기분이 나쁘면 방문을 닫고 들어가 틀어박힌다. 좋아하는 게임도 하고 영상도 실컷 보고 혼자서 스트레스를 푼다. 나는 이것을 '파업'이라고 부른다. 신혼 때부터 출산 초기까지는 기분이 나쁘면 열흘 넘게 나를 투명인간 취급했다. 많은 읍소 끝에 지금은 마음을 넓게 쓰셔서 반 정도로 줄었다.


남편이 파업을 한 관계로 모두 내 몫이 되었다. 아이를 하원시키고 하원길에 만난 아이 친구 엄마와 함께 다 같이 돈가스를 사 먹었다. 후환이 두려워 같이 먹겠느냐고 전화를 했더니 본인은 벌써 먹었단다.


아직도 목소리에 화가 잔뜩 묻어 있기에, 내일부터 잘하겠다고 했는데  화가 났느냐 물으니 '그 시간에 니는 뭐 했는데'라고 대들었기 때문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아니라고, 내일부터 잘하겠다고, 재차 이야기했다. 알겠다고 대답을 하더니 끊는다.


아이와 저녁을 먹고 들어가도 남편은 나와보지를 않는다. 내가 한 번 그런 적이 있었는데 그 죗값으로 나를 열흘 동안 투명인간 취급 했었다. 그 뒤로는 아이를 재우고 있어도, 기저귀를 갈고 있었어도, 똥을 싸고 있었어도 문 앞에 나가 그를 맞이해야만 했다. 그래놓고 본인은 화나면 오든 말든이다. 내로남불이라는 말을 우리 집에서는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나한테 화가 난 건 알겠는데 아이한테까지 그러는 것은 그래도 너무 했다. 예전에 시아버지께서 화가 날 때마다 가출을 하셨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결혼을 한 내 잘못이다. 불화는 대물림되는 걸까? 높은 확률로 그런 것 같지만, 내 딸은 제발 그렇지 않았으면 한다.




빨랫비누를 산 이유는 마음의 때를 벗겨내고 싶느니 하는 시적인 이유 때문 아니다. 아이를 임신하고 출산하면서 선물이나 경품 당첨 등으로 빨랫비누를 꽤 많이 받았었다. '이것 다 언제 쓰나.'라고 생각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 마지막 빨랫비누도 거의 종잇장처럼 얇아졌다. 철저히 필요에 의한 구매인 셈.


빨랫비누를 사러 가는 길은 상쾌하고 따뜻했다.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다가 시간이 부족해서 육교를 이용했는데,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낮 기온 14도'라는 안내문구를 보았다. 오늘 멀리까지 숲체험을 나간다기에 내복에 따뜻한 패딩까지 입혀 보낸 아이 생각이 났다. 흠. 오전에는 추웠을 거야. 잘한 일이야.


아참. 옷 입혀주시는 분이 나타나신 덕분에 오늘은 수월하게 등원 준비를 할 수 있었다. 마주칠 때마다 눈을 내리까느라 불편하긴 했지만 허겁지겁 바쁘고 정신없는 아침시간이 아니어서 좋았다.


시간이 좀 남아서 내 아침으로는 셰이크를 타 먹었다. 남편에게는 셰이크를 타주겠다고 물어볼 때마다 100%의 확률로 거절을 당하기에 일부러 묻지 않았다.


남편은 지병이 있어 매일 아침 약을 먹는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데 남편이 그렇게 아침마다 약을 먹는데 아침 식사를 챙겨주지 않는다고 뭐라고 했던 일이 생각났다. 그놈의 잔소리. 잔소리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물론 빨랫비누로 지 수있다면 지우고 싶은 것이 아주 많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기에, 나는 종종 인스타에서 우연히 보게 된 어느 인플루언서의 현답을 떠올린다.

깊은 괴로움에 몸서리치는 나에게 이 말은 무나 신선했다. 단단하면서도 담백한 이 마음가짐. 게다가 '당'으로 끝나는 어미마저 발랄하다. 도 이 마음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잊지 않으려고 보자마자 캡처를 했다. 그래. 나도 그땐 그게 최선의 선택이었던 거양.




이 글도 곧 빨랫비누로 지우고 싶어 질까? 브런치는 사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나만의 '대나무숲'이어서 좀 더 깊고 내밀한 이야기도 털어놓게 된다. 인스타에 글을 올릴 때는 지인들이 보고 있다는 것을 아무래도 신경 쓰게 되니 '전체관람가'로 글을 썼다면 지금은 15세 관람가 정도는 되는 것 같다.


가끔 나만의 대나무숲이 다음 메인에 소개되는 바람에 유명 관광지로 반짝 급부상할 때가 있지만, 그저 감사한 일이다. 좀 더 신중한 글쓰기를 해야 하나 고민될 때도 있지만, 나만의 대나무숲을 떠나고 싶지는 않다.




이 빨랫비누의 이름이 '소키'인 이유는 찌든 때도 '속히' 지워지기 때문이라고 한다. 인터넷을 검색해서 찾아본 사용 후기에서 김칫국물도 말끔하게 지워지는 것을 보고 구매한 제품이다. 성능이 좋았으면 좋겠다.


빨랫비누를 산 기념으로 나도 속히 마음의 먹구름을 걷어내야겠다. 끙끙 끌어안고 있어 봤자 내 속만 시커메진다. 뽀얗게 빨버려야지. 툭툭 털어버려야지.


엄마니까. 딸이니까. 내 삶은 소중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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