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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딘도 Nov 13. 2023

오늘은 남편 흉 좀 봐야겠다

이보시오 벗님네들 억울한 사연 좀 들어주오

남편이 화가 잔뜩 났다. 나 때문에 회사에 늦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같은 건물에서 일을 한다. 차를 타고 나와 아이를 등원시키고 함께 회사에 출근한다.


보통 내가 아침에 더 분주하다. 아이 옷도 입히고, 머리도 묶어주고, 밥도 챙겨주고, 나도 씻고 머리 말리고 옷 입고 준비하려면 쉴 틈 없이 움직여야 한다.


반면 남편의 준비과정은 단출하다. 수염을 깎고 양치를 하고 세수를 하고 짧은 머리를 감는다. 머리를 말리는 것도 쉽고 말리지 않아도 몇 번 비비면 마른다.


내가 아이 옷을 입혀 식탁에 앉혀두고 빵과 우유를 내준 뒤 머리를 묶어주고 씻으러 들어간 사이 남편이 씻고 나왔다. 회사는 걸어서 갈 만큼 가깝기 때문에, 시간이 모자랄 때는 남편에게 등원을 부탁한다. 나 빼고 두 사람이 모두 준비가 된 상태에서 나를 기다릴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도 같은 부탁을 하고 씻고 나왔더니 남편이 잔뜩 화가 나 있다. 아마도 아이가 맘처럼 빠릿빠릿하게 움직여 주지 않았겠지. 그 마음을 이해하기에 아이를 어르고 달래 차에 태우고 함께 등원을 시켰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남편이 나에게 뾰족한 소리를 한다.


"7시에 (방에서) 나오면 되는데 왜 맨날 늦노!"


마치 내가 방에서 나오기 전에 미리 출근 준비를 하고 아이를 준비시킨 듯한 당당함에 할 말이 없어 미처 빗지 못하고 나온 머리를 매만졌다. 내 입장을 이야기해 봤자 불 난 집에 기름을 부어주는 격이라 이럴 때는 무시가 답이다.


"월요일에 이불하고 짐 많은 것 알면서 꼭 그때만 먼저 가라는 건 뭔데?"

"요일에만 그렇게 말했는지 몰랐네."

"50분 넘어서까지 준비가 안되면 어떡하는데?"


팩트 하나, 45분쯤에 준비를 마쳤으며, 팩트 둘, 나도 혼자만 준비하면 이만큼 늦을 일이 없다. 빠직. 잘 참고 있는 잔잔한 호수에 자꾸 돌을 던지니 물이 튀었다.


"도 혼자만 준비하면 그만큼 안 늦어."

"카면 내가 옷 입히면 니 안 늦겠네? 으로 옷은 내가 입힐 테니까 한 번만 더 늦기만 해 봐!"

"그래, 알았어. 안 늦을게."


억울하고 도통 이해되지 않는 것들 투성이었지만 그 마음을 다 말해봤자 결과가 좋았던 적이 없었다.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 상책이요, 총성이 잦아들기를 기다리는 것이 평화의 비결이다. 그러나 나는 그가 마지막으로 중얼거리는 말에 화를 참지 못하고 차문을 쾅 닫고 말았다.


"아침이라고는 제대로 주지도 않고 빵 쪼가리 하나 주면서! 늦었는데 머리는 왜 묶어주노!"




이런 말을 듣고 출근한 날이면 솔직히 사표를 던지고 싶다. 나는 우리 집 수입의 50%를 담당하고 있는데도 왜 이렇게 죄인처럼 살아가야 할까? 같은 직장에서 같은 월급을 받으며 같은 시간 동안 일을 하는데도 아침에 아이를 돌보고 식사를 담당하는 의무가 나에게 있는 것이 우리 집에서는 왜 당연할까?

 

오늘에라도 당장 퇴직원을 작성해서 올리고 싶었지만,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집안의 수입이 반으로 줄어드는 것을 감당하기 어렵겠다는 판단 때문이 아니었다. '일을 관둬도 어차피 같은 잔소리를, 어쩌면 더 심하게 들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집에만 있는데도 왜 그 모양이냐고 또 얼마나 닦달을 할까? 돈 벌어온다고 얼마나 또 유세를 떨까?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그 꼴을 보기 싫어서라도 나는 출근을 해야만 했다.


내년부터 유치원을 멀리 보내기로 했다. 나보다는 남편이 저녁약속이 많은 편이니 내가 일찍 출퇴근해서 하원을 담당하고, 남편이 나보다 한 시간 늦게 출퇴근하면서 등원을 담당하기로 정 합의했다.


그런데 오늘 그의 총질을 보니 벌써부터 걱정이 된다. 내가 등원담당이 아니라 해도 그는 분명 나에게 책임을 물을 것이다. 애가 자고 있는 동안 등원준비는 신경도 안 쓰고 자기만 쏙 출근해 버린다고 말이다. 그런 잔소리를 들을 바에야 내가 등원담당을 한다면? 하원담당이 맡기로 한 저녁준비 높은 확률로 내 몫이 될 것이다.




다시 잊고 있었던 결심을 떠올린다.


'그는 덤이다.'


원래부터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나 혼자 모든 것을 하는 마음이 조금은 편해진다. 그러다가 무엇이라도 거들어주는 날에는 아주 고마운 마음을 갖게 된다.


등원을 시킬 때도 내가 혼자서 다 준비를 시키고 운전까지 해서 회사로 출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더욱 책임감을 갖게 된다. 고맙게도 아이 아빠가 10분 남짓 거리를 매일 아침 운전해 주니 참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어쨌든 내일부터 덤으로 아이의 옷 입혀주는 사람이 나타날 예정이다. 50분이 넘어서까지 내가 준비가 안되어 있는 일이 가장 화가 난다고 하니, 다 던져두고 나부터 준비하면 되겠다.


빵 쪼가리 주는 것이 그렇게 화가 난다고 하는데, 아침부터 육수라도 고아야 하나? 말을 곱게 하면 상대방을 깊게 찌르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을 텐데 남편은 그게 잘 안되나 보다.


내가 입을 다물고 있는 이유는 혼나도 싸고 죽어도 할 말이 없는 죄인이어서가 아니다. 폭탄이 떨어지는 시간을 빨리 지나가 비결이 바로 침묵과 인정이기 때문이다. 7년간 함께 살면서 터득한 나만의 비법이다. 상대방은 내가 이 기술을 쓰는지 모른다. 반성하는 줄 알겠지.


어쨌든 나는 한 번 더 그의 뜻에 맞추기로 했으니 반성이나 침묵이나 결과는 동일하다. 일부터 잔소리 안 듣게 잘해야지. 어휴. 어휴. 어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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