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이름은 산들!

엄마의 편지 03

by 살아 숨쉬는 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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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들아.

순례자의 도시에 첫발을 내디뎠구나. 마치 내가 생장에 있는 것처럼 설렌다. 오늘 엄마는 서재를 정리하다 파울로 코엘료의 『순례자』를 발견하고는 단숨에 읽었어. 그러다보니 마치 나 도 순례를 떠난 것만 같더구나. 너는 그곳에서, 나는 이곳에서.


“검을 찾는 일은 오직 당신에게 달려 있어요.”

“시간의 리듬을 결정하는 건 우리 자신입니다.”

- 『순례자』 (파울로 코엘료) 중에서


엄마의 가슴을 흔든 구절이야. 그래. 너의 인생은 오직 너만이 살 수 있고, 아무도 대신 해줄 수가 없지. 『순례자』에서 코엘료를 돕던 페트루스가 어디까지나 안내자의 역할만 했던 것처럼, 산티아고를 앞두고 페트루스는 어딘가로 사라지고 마지막 순간에는 오로지 코엘료 혼자의 힘으로 산티아고에 도착해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엄마나 친구, 선생님은 너에게 안내자는 되어줄 수 있지만 결국 마지막 한 발은 네 스스로의 힘으로 디뎌야 하는 것이지. 생각해보면 지금껏 엄마는 시행착오를 줄여준답시고 네가 해야 할 많은 부분을 서둘러서 한다거나, 시간을 절약한답시고 너를 자동차에 태워서는 학교 앞까지 데려다주는 부질없는 일을 참 많이 했었구나. 늦었지만 이제야 엄마의 어리석음을 본다.


네가 태어날 때만 해도 당당한, 독립적인 아이로 키우려고 했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조급해져서는 본래의 마음을 잊고 산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오늘은 이 세상에 첫 울음을 알린 너의 이름, ‘산들’에 얽힌 이야기로 너를 응원해주고 싶다.


엄마의 이름에 얽힌 이야기부터 먼저 해야겠다. 지금은 ‘진숙’이라는 나의 이름을 기껍게 받아들이지만, 어렸을 때는 정말 싫어했단다. 보배 진, 맑을 숙. ‘맑고 깨끗한 보배가 되어라.’라는 할아버지, 그러니까 네게는 왕할아버지의 염원이 담긴 이름이지. 의미는 좋지만, 그 이름이 정말 싫었어. 특히 ‘숙’이라는 글자의 소리가 싫었단다. ‘ㄱ’을 발음이 폐쇄음이잖아. 그래서 ‘숙’을 발음하다 보면 마치 내 인생이 콱 막히는 느낌이 들었단다. 또 엄마 세대의 많은 여자 아이들의 이름자 끝에는 대개 ‘숙’을 썼는데, 그것도 싫은 이유 중의 하나였어.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에는 이름에 대한 별다른 생각이 없었어. 그저, ‘왜 나는 남동생들과 달리 집안의 항렬자를 붙이지 않은 거지? 왜 나만 이름이 다르지?’ 하는 정도의 생각이었단다. 그런데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보니 너무도 멋진 이름을 가진 친구들이 많은 거야. ‘경희, 애희, 용혜, 국주’같은 이름을 가진 아이들을 보며 나도 멋진 이름을 갖고 싶다는 욕망이 꿈틀거렸어.


그래서 틈만 나면 할아버지께 개명을 해달라고 졸랐지. 어린 내 생각으로는 태어나는 건 내 마음대로 할 수 없고, 부모를 바꿀 수도 없지만, 이름은 내 뜻대로 바꿀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단다. 하지만 외할아버지는 한 마디로 ‘NO’였어.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을 함부로 바꿀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지. 아무리 외할아버지를 졸라도 이름을 바꿀 수 없었는데, 그때부터 엄마의 이름 짓기가 시작되었단다. 혼자만의 놀이였어. 엄마의 이름자 중에서 받침을 빼거나 순서를 바꾸고, 또 한글로 바꾼 이름들인데, ‘수진, 수지, 지수, 보배, 맑음’ 같은 이름들이었단다. 그렇게 예쁜 이름들을 두고 왜 마음에 들지 않는 이름을 계속 불러야 하는지 어린 나로서는 이해되지 않는 때였어.


아빠를 만나 결혼을 하면서 아이가 생기면 예쁜 이름을 지어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아빠도 같은 생각이었어. 한글 이름을 짓기로 했단다. 서예가인 아빠 역시 ‘먼별’이라는 호를 가지고 있을 정도로 한글에 대한 사랑이 컸잖아. 네가 태어나고, 그때부터 네 이름 짓기가 시작되었어. 아빠가 출근한 후 혼자 남은 엄마는 예쁘다고 생각되는 이름들을 하나씩 지어보고, 불러보고, 수첩에 적어 두었어. 그리고 아빠가 퇴근해서 오면 함께 불러보며 네 이름을 무엇으로 정할지 고민했지. 어떤 날은 ‘하늘이’가 되었다가, 어떤 날은 ‘햇살이’가 되었다가, 또 어떤 날은 ‘여울이’가 되었어. 온갖 이름을 생각해내고, 전화번호부를 펼쳐서는 같은 이름이 있는지 확인도 해보면서 정한 이름이 산과 들, 산들이야.


산과 들에는 나무와 꽃, 곡식이 자라는 곳이고, 산과 들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사람을 기분 좋게 해주잖아. 그런 이름을 가진 아이라면 세상에 이로운 사람이 되겠다고 생각했지. ‘산들’이라는 이름을 만들어놓고 얼마나 뿌듯하던지. 그런 엄마 아빠의 마음이 담긴 이름을 가진 네가 자라 넓은 세상을 혼자서 다니다니. 정말 대견하다. 아마 아빠도 우리 곁에 있었다면 ‘우리 딸 멋지다’라고 격려해 주었을 거야.


내일부터 네가 밟을 땅, 네가 만날 사람들 속에서 더 크고 넓어진 영혼으로 사람들에게 산들바람 같은 위안을 주는 사람이길 빌어본다. 멋진 날 맞이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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