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길의 산뜻한 시작, 26km

산들의 편지 03

by 살아 숨쉬는 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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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오늘은 26킬로를 걸었어. 내가 걱정한 것보다 힘들지는 않더라고. 씻고 보니 발가락 군데군데가 빨갛게 익어있어. 아무래도 내일이면 물집이 생길 것 같지만 앞으로도 잘 걸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나 벌써부터 산티아고 체질인 것 같다는 기분이야!


사실, 어젯밤에는 동키 서비스를 이용했어. 동키 서비스는 순례자들의 짐을 다음 목적지까지 보내주는 서비스야. 순례길을 걱정하는 나를 보며, 피레네 산맥을 넘는 첫 코스는 정말 힘들기 때문에 짐을 붙이는 게 좋다는 숙소 아저씨 덕분에 알게 되었어. 생장에 있는 동키 서비스 사무실은 다른 곳과는 달리 짐을 두 군데로 보내줘. 하나는 다음 목적지인 론세스바예스, 그리고 하나는 최종 목적지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의 우체국까지. 나는 작은 배낭에 물통, 카메라, 간식거리만 챙기고는 큰 짐을 론세스바예스의 수도원으로 보냈어. 론세스바예스에는 알베르게가 큰 수도원 하나밖에 없으니까 모두들 그쪽으로 짐을 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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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깨워도 일어나지 않던 초등학생의 나는, 소풍을 간다거나 수학여행을 가는 날 아침에는 정말 잘 일어났잖아. 오늘도 그랬어. 설레는 첫날, 아직 해가 미처 못 뜬 깜깜한 가운데 눈을 떴어. 밖에는 순례자가 한 명 두 명 지나가더라. 지도도 없는 나는 그냥 무작정 그 사람들이 가는 방향으로 따라갔어. 오늘이 힘들 거란 건 예상했지만, 정말 해가 뜨기도 전에 피레네 산맥에 오를 줄을 몰랐어. 한 10분 정도 평탄할 길을 걸을 후로는 계속 오르막인 거야. 경사가 너무 급해서 로프까지 잡고 올라야 했어. 어제저녁 나에게 동키 서비스를 알려준 주인아저씨의 얼굴이 떠올랐어, 너무 고마웠어. 가파른 길이 끝나는 지점에는 오리손(Orison) 산장이 있었어. 생장에 오전에 도착한다면 오리손 산장에서 묵으면 좀 수월하겠다는 생각도 들었어. 생장에서 론세스바예스까지는 26킬로라 좀 많이 걸어야 하고, 또 오르막이 많아서 힘든 코스이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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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장의 1층은 카페였는데, 그곳에서 바게트 샌드위치를 하나 사서 점심으로 보관하고 카페 라테, 스페인어로 카페 콘 레체를 한 잔 마셨어. 오리손 산장부터는 계속 산길이라 점심을 살 수 있는 곳이 없대. 길을 걷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내가 얼마나 정보 하나 없이, 무모하게 출발했는지 알게 되었어. 그래도 좋은 사람들을 만나 도움을 받으니까 괜찮아. 여기서는 모두 서로 도우며 걸어. 함께 걷는 거지.


엄마.

오리손 산장을 지나고부터는 끝없이 오르락내리락하는 초원 같은 산길을 걷게 된다. 그곳에서 내가 잊고 있었던 단어 하나를 떠올렸어. 솔개. 솔개를 본 거야. 그동안 입 밖으로 내뱉은 적이 없는 단어야 솔개는. 사실 내가 본 게 어떤 새인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솔개인 것 같아. 어렸을 때 읽었던 전래동화와 그 시절의 내가 떠오르는 신기한 경험이었어. 앞으로도 이 길은 나에게 끝없는 경험을 가져다주겠지?


론세스바예스를 11킬로 남긴 지점에서 푸드트럭 하나를 발견했어. 구세주였어. 바나나와 물, 콜라를 팔더라고. 콜라를 사서 아까 먹다 남은 샌드위치와 함께 먹었어. 론세스바예스를 5킬로 정도 남겨둔 지점부터는 어쩌다 보니 무리를 지어서 걷게 되었어. 다들 지쳐서 그런가 걷는 속도가 정말 비슷해졌어. 어제 생장으로 오는 버스를 같이 타게 된 한국인 친구 둘, 오리손 산장쯤에서 만난 친구, 어제저녁 숙소에서 인사했던 독일 친구 마틸다와, 또 역사를 전공한 프랑스 사람들과 걷게 되었어. 산을 내려가는 길에 프랑스 사람들이 산 아래에 있던 ‘벙크’에 대해 설명해줬어. 공습을 피하기 위해 만든 곳이라며 대피소끼리 연결되어 있다는 이야기도 해주는데, 마치 디스커버리 채널에 나오는 사람들 같았어. 어릴 때 내가 진짜 좋아했던 우주소년단에서 캠프를 갔던 생각이 나기도 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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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여름이라, 해가 길다. 3시쯤 론세스바예스에 도착해 가방도 찾고, 시원하게 샤워도 하고, 오늘 입었던 옷가지를 손빨래해서 볕 드는 곳에 잘 널어놨어. 수도원에서 판매하는 순례자용 일기장을 12유로 주고 구매도 했어. 하루 일정이 끝나고 내 시간이 정말 많아서 일기를 쓸 수 있을 것 같아. 이곳 수도원은 론세스바예스의 하나뿐인 알베르게이지만, 300명이 조금 넘는 순례자를 수용할 수 있는 아주 큰 곳이야. 사실 피레네를 넘을 때, 무거운 짐을 들고 가는 순례자들을 보며 짐을 붙이고 홀가분하게 걷는 나 자신을 후회하기도 했거든. 나는 온전히 내 힘으로 걷지 못하는 건가 하며. 그런데 론세스바예스에 도착하고 보니 아저씨의 말을 듣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어. 좀 더 늦게 도착했더라면 볕 드는 3층이 아닌 지하에서 자야 했거든.


오늘은 처음으로 ‘순례자 디너’를 먹었어. 수도원에서 준비해주는 식사를 순례자들이 다 함께 모여 먹을 수 있었어. 벤츠에서 일하는 독일 아저씨들, 프랑스에서 온 프랑소와를 만나 함께 저녁을 먹었어. 프랑소와는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등 다양한 곳을 돌아다니며 일을 한대. 회사에서 2-3년 일하다 다른 나라로 이직을 한다며, 지금은 코펜하겐에서 일을 하고 있대. 그게 참 부러웠어. 영어와 프랑스어를 한다면 유럽에서 일하는 곳은 많아 어려움이 없대. 새삼 오늘 피레네를 넘으며 프랑스 국경에서 스페인 국경으로 넘었단 사실이 떠올랐어. 자연스럽게 내 발로 넘을 수 있었던 국경처럼, 유럽에서는 직장 이동에서도 국경의 장벽이 없나 봐.


저녁을 먹고 혼자 산책하다가 미국 애리조나에서 온 성격 좋은 아줌마를 만났어. 아줌마를 따라 미사를 보러 성당에 가봤어. 신부님이 순례자들을 위하여 스페인어와 영어로 따뜻한 이야기를 전해주었어. 신부님은 매일 저녁 미사를 본다고 하시던데, 문득 궁금해지기도 했어. 항상 이렇게 좋은 말만 해주실까? 매일 새로운 말을 전하는 건 힘들지 않을까 하며.


이곳은 10시가 소등시간이래. 오늘은 저녁에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겠다.

먼저 잘게. 그럼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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