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사랑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올 초에 중학교때부터 친했던 친구와 어떻게 손절을 하게 되었는지 구구절절 설명해야될 것만 같다.
친구와 손절을 하게 된 계기는 굉장히 어이가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나는 그와,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의 해석을 두고 싸우다 손절했다. 그는 첫사랑은 늘 짝사랑이기 때문에 이루어 지지 못하는 것이라 풀이했고 나는 대부분 첫사랑이 영원토록 이어지지 않으니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풀이했다. 뭐 이딴 걸로 손절하냐고? 나도 어처구니가 없다.
어쨌든 나는 짝사랑은 쌍방이 아니니 사랑으로 치기엔 무리가 있지 않냐는 입장(때문에 쌍방으로 한 사랑 중 처음핮 사랑을 첫사랑으로 쳐야한다는) 이었고 그는 내가 한번도 "제대로 된" 짝사랑을 못해봐서 그렇게 이야기한다고 주장했다. 뭐,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짝사랑, "제대로" 경험해 본 적은 없다.
나는 승산이 없는 게임을 무지하게 싫어한다. 다시 말해 실패하는 것을 매우 무서워 한다. 실패할 것 같은 시도는 아예 하지 않는 편이고 실패할 것이 확실해진 시도는 중간 어느께에서부터는 잘하기 위해 노력하기보단 실패의 당위성을 찾기에 급급하다. 일에서도 그렇고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로 게으른 완벽주의자성향이 매우 강하다. 어떤 인간관계의 상태가 내 기준에 완벽하지않으면 나는 늘 실패의 당위를 찾기에 급급하다 결국 그 인간관계에 실패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한번도 제대로 된 짝사랑을 해본 적이 없다. 나에게 호감있는 상대에게만 마음이 갔고, 호감여부가 불분명한 사람에게 향한 마음은 급히 식어갔다. 실패하기싫은 완벽주의자 성향은 승산이 없는 상대에게는 배팅하지 않았고 그래서 언제나 사귀기 전 술이 거나하게 취한 후 갈긴 키스에 상대방은 응답을 했었다. 그렇세 성공적인 시작을 주위에 알렸고 내 관계의 처음은 늘 여느 영화처럼 완벽했다.
하지만 그래서 늘 실패한 마무리를 하기도 했다. 내 20대 초반의 정신나간 상태를 정의할 첫사랑은 실패의 당위를 찾기에 급급한 나머지 성급히 마무리해버렸었다. 그게 그렇게 뼈에 사무쳤었다. 다음번 연애에서는 그러지 말아야지, 했어도 잘 풀리지 않았던건 실패의 낌새가 조금이라도 보이면 급히 벽을 치고 '이래서 헤어지나? 헤어질까? 이제끝인가?' 를 계산했기 때문이었지 않을까. 그래서 연애의 시작은 늘 쌍방으로 했지만 끝은 항상 나 혼자의 외사랑으로 마무리 되었다. 스스로 끊어낸 뒤에도 마음만 남아 늘 상대를 그리워했다.
그러니 시작부터 "제대로 된" 짝사랑은 한번도 해본 적이 없는게 맞다. 하지만 늘 그렇듯 마무리안 된 미완결의 외사랑은 생에 점철되어 있다. 나에 대해 모든 걸 다 안단 듯이 늘 나를 정의하던 그는 그 사실은 미처 보지못했나보다. 아니면 보고싶어하지 않았거나. 언제나 사람은 남의 큰병보다 자신의 고뿔이 더 중한 법이니까.
그 친구와는 원래 자주 손절을 하고 자주 화해를 했다. 사실은 올 초에 손절하기 딱 이년전에도 손절을 했고 정작 화해를 한건 몇개월 되지 않았다. 이 글의 교훈은 다름아닌 [사진1]이다.
맞지 않는사람은 끝까지 맞지않는다는 점. 그러니 맞지않는 사람과는 애써 관계를 이어가려 하지않는 것이 장기적인 멘탈관리에 도움이된다는 점. 이 자명하지만 나이를 먹지않으면 모르는 사실이 이 글의 주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