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의 딸이 본 서울 지하철
어둠의 연속. 합격한 대학교를 가기 위해, 지하철을 한 시간 동안 탔을 때 들었던 생각이다. 집과 가장 가까운 역이 1호선이었기에 목적지까지의 풍경이 고스란히 보이는 지상철에 익숙했다. 처음으로 아무런 풍경이 보이지 않는 껌껌한 지하만 쳐다보고 있자니 꽤나 답답했다. 한강을 건너기 위해 다리 위로 전철이 지나가는 순간, 한 시간 동안 참았던 숨을 토해내는 것만 같았다. 학교를 다니는 4년간 어두컴컴한 지하철에서 1728시간, 날짜로 치면 72일을 보냈다. 집에서 학교까지 가는 길, 다양한 동네들을 수백 번 지나쳤겠지만, 그 동네들에 대해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지하철은 서울을 역 단위로 분절할 뿐이었다.
나는 이제 꽤나 유명해진 ‘이부망천’ 출신이다. 서울서 살다 이혼하면 부천을, 거기서 사업이 망하면 인천으로 간다는 어떤 정치인의 발언. 많은 ‘이부망천’ 사람들이 그의 망언에 열불을 냈지만, 동시에 누군가는 어느 정도 고개를 끄덕였을지도 모른다. ‘이부망천’엔 토박이 어른을 찾기 힘들다. 지방에서 상경해 서울을 대신해서 정착하신 분들이 많기 때문이다. 애초에 부천의 존재는 서울의 주거기능을 해결하기 위한 위성도시이기도 했다. 1호선의 인천~신도림 구간은 출퇴근 시간이 아니라도 항상 자리가 없는 이유도 서울과 맞닿아있다. 신도림은 서울의 핵심 노른자 라인인 2호선의 첫 환승역이다.
‘이부망천’ 사람들과 서울을 때 놓을 수 없다. 과연 이곳만 그럴까. 서울 근교의 경기도 지역, 서쪽에 이부망천이 있다면, 동쪽으로는 하남이, 북쪽으로는 의정부가, 남쪽에는 과천이 그렇다. 지하철 노선도가 점점 촘촘하게 짜일수록 사람들은 서울로 향한다. 서울엔 빅 5라 불리는 대형병원이 있다. 내놓으라 하는 명문대들이 2호선을 중심으로 몰려 있다. 박물관과 뮤지컬관이 있다. 국민들의 권력을 위임받은 국회와 대통령이 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중요 요소 하나가 바로 지하철이다. 지하철 노선의 생성은 얼마나 서울로 더 빨리, 쉽게 가는가와 연결돼있다.
서울 이곳저곳을 쉽게 다닐 수 있는 교통수단. 서울의 지하철은 숨겨진 권력이다. 겉으론 드러나지 않지만 지하에 꽁꽁 숨겨진 거대한 힘. 이동이 쉽다는 것만큼 큰 권력이 없다. 교통이 편한 곳엔 사람이 있고, 사람이 있는 곳엔 돈이 있고, 돈이 있는 곳엔 인프라가 구축된다. 그래서 서울의 지하철은 권력이다. 교통권, 이 낯선 단어는 기본권과 맞닿아있다. 경제적, 지역적, 신체적, 사회적 여건에 상관없이 자유롭고 안전하게 이동할 권리를, 우리는 자주 잊고 산다. 서울로 집약된 노선도가 당연하게 느껴지고, 그곳에 권력과 재원이 넘치는 것을 의심하지 않은 채 서울로 향한다. 그렇게 그레고리 헨더슨의 말처럼 “서울이 곧 한국”이 돼버린다.
스터디를 위해, 데이트를 위해 일주일에 3번 이상 서울로 향하는 전철에 몸을 싣는다. 서울의 지하철을 수도 없이 오랜 시간 탔지만, 지하철을 오래 탔다고 한들 내게 서울의 권력이 주어지진 않는다. 어두컴컴한 땅속만 지나다닐 뿐이다. 셀 수도 없는 나의 시간들은 그렇게 서울 지하철 노선도에 흩뿌려져 왔다. 휴대폰을 보거나, 멍을 때리거나, 아주 가끔은 책을 읽으면서 시간들을 흘려보냈다. 경기도 사람들은 목적지까지 한 시간이 걸리면 가깝다고 하는 반면, 서울 사람들은 멀다고 한다는 꽤나 유행이 지난 농담이 있다. 사실 웃기기보단 뼈아픈 이야기다. 비서울인의 시간이 그렇게, 숱한 기간, 아무렇지 않게 서울 지하철에게 저당 잡혀왔기에 뼈아픈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