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킹맘을 디자인해드립니다 (8)
“해수야… 넌… 절대 그만두지 마… 나처럼 후회하지 마.”
학교를 그만둘 생각에 망망대해에서 헤매고 있었던 해수는 절친 수정의 말에 저 멀리 희미하게 반짝이는 등대를 발견합니다.
늦은 밤.
수정은 정처 없이 길을 헤매고 있습니다.
무음으로 해놓은 휴대폰에는 남편의 부재중 전화가 15통.
어릴 때부터 똑똑하고 야무져서 학창 시절 공부도 늘 탑이었고, 졸업 전에 원하는 회사에 취직하고 집에 손 벌리지 않고 모은 돈으로만 결혼 준비를 했던 수정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열심히 다녔던 회사를 아이가 태어나자 미련 없이 그만뒀습니다. 임신했을 때부터 섬렵했던 많은 육아책에서 만 3세까지는 엄마가 키워야지 지능과 인성이 바르게 성장한다고 입을 모아 조언했기 때문입니다.
수정은 공부하고 일할 때 썼던 열정을 온전히 아이에게 쏟아부었습니다. 아이에 몸에 해로울까 봐 일회용 기저귀는 대신 천기저귀를 사용했고 이유식은 매끼마다 새로 만들어 먹였으며 어린이집에도 보내지 않았습니다. 종일 혼자 아이를 돌봤지만 돈 버느라 힘들 남편을 위해 집도 항상 깔끔하게 치웠습니다. 남편은 아이가 생긴 후에도 회사 동호회 3개에서 활동하느라 주말에도 번번이 집을 비웠지만 괜찮았습니다. 자신을 갈아 넣어 키운 덕분인지 수정의 아들은 또래에 비해 똘똘하고 말도 잘했습니다.
그런데 한 달 전.
동호회 뒤풀이 후, 잔뜩 취해 밤늦게 들어온 남편이 대뜸 수정에게 말했습니다.
“넌 언제까지 놀꺼야? 이제 돈 벌 때도 됐잖아.”
술에 취해 내뱉은 남편의 진심에 수정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이 말은 며칠 동안 수정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며칠 후. 수정은 아들을 일찍 재우고 남편과 마주 앉았습니다.
“술김에 한 헛소리 아니야. 너 언제 다시 일할꺼야? 나 혼자 벌어서 언제 집 사고 애 키워? 그냥 적당히 컸을 때 어린이집 보내고 다시 일하지… 왜 아무데도 안 보내고 계속 집에 데리고 있는 거야?”
남편의 말에 그동안 견고했던 수정의 가치관이 마구 흔들리며 정신이 혼비해졌습니다. 하지만 어떤 반론도 할 수 없었던 수정은 그 길로 무작정 집을 나왔습니다. 좌표를 잃어버린 배처럼 어딜 가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습니다.
“내가 희생해야 한다고 생각했어. 엄마니깐… 내 욕망보다는 아이에게 맞추는 게 옳다고…
남편의 말에 너무 화가 났지만… 더 화가 나는 건… 정말 최선을 다했는데도 지금 내가 원하는 게 뭔지 나도 잘 모르겠다는 거야.
해수야. 넌 너를 제일 먼저 생각해. 아이와 남편은 가족이지만 나 자신은 아니더라.”
언제나 똑부러지고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엄마라고 생각했던 친구의 진심 어린 조언이 허우적거리던 해수는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상태를 상세하고 현실적으로 비춰봤습니다. 끝을 알 수 없게 깊을 거라고 생각했던 눈물의 바다는 겨우 무릎 정도의 깊이였습니다. 이제 그만 울고 나를 위해 모든 방법을 동원하기로 마음먹습니다.
마음에 썩 내키지 않았던 시터 이모님… 그리고 체력이 좋지 않은 친정 엄마. 곰곰이 생각해보니 처음부터 세팅이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해수는 개학까지 일주일 남은 상황에서 다시 한번 육아 세팅에 들어갑니다. 지난 3개월 간의 경험으로 일과 육아 사이에서 가장 힘든 건 바로 엄마, 해수 자신임을 받아들이기로 합니다. 이건 투정이나 어리광이 아닌… 누구에게 미안하거나 죄책감을 느낄 일이 아닌… 그저 팩트일 뿐이니까요.
해수는 한참 남은 육아라는 긴 여정에 당당한 조정사가 되기로 마음먹습니다. 그 어떤 잡소리에도 귀 기울이지 않는 주체적이면서 이기적인 조정사 말이죠.
“오빠는 내가 계속 일했으면 좋겠어? 아니면 집에서 윤서 보면 좋겠어?”
“나야… 네가 원하는 데로 하는 게 좋지. 근데 능력이 있는데 집에만 있기는 아깝기도 하고...”
“… 그래? 난 계속 내 이름을 가지고 일하고 싶어. 그러려면 오빠가 꼭 지켜줬으면 하는 게 있어”
해수는 제일 먼저 아이의 또 다른 부모이자 육아 동지인 남편과 마주했습니다. 친구들의 사례를 통해 어떤 상황에서도 신뢰와 유대감을 유지해야 하는 사람은 배우 자라는 걸 배웠기 때문입니다. 해수는 숨을 크게 한번 내쉬고 남편의 두툼한 손을 잡았습니다. 그리곤 복직 뒤에 자신이 느낀 복잡하고 다양한 감정과 두려움을 차분히 이야기합니다.
남편과 2시간 정도 대화를 한 뒤, 해수는 놀라운 사실을 알았습니다. 함께 살며 같이 아이를 키운 남편 이건만… 생각보다 나의 마음과 어려움을 모르고 있다는 걸요. 아이는 공동의 작품인데… 아빠보단 엄마가 더 복잡한 상황에 놓여있다는 게 억울했지만… 속으로 불만만 쌓지 말고 앞으론 내면의 불안과 걱정을 자주 알려줘야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리고! 일하는 엄마로서 숙련이 되고 아이가 어느 정도 성장할 때까지 육아의 주체는 두 사람이며 모든 결정과 책임은 둘이서 함께 하기로 약속합니다. 마지막으로 돈과 아웃소싱으로 해결할 수 있는 건 아까워하지 말고 최대한 활용하기로두요.
굳이 약속할 것도 없는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제 해수는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겠거니…’라고 지레짐작만으론 아이와 함께하는 행복한 가정을 유지할 수 없다는 걸요.
남은 일주일 동안 해수는 가장 급한 베이비 시터를 구하는데 총력을 다합니다.
시터 소개소, 구인 홈피, 지인들… 할 수 있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합니다. 그렇게 아름아름 연락처를 받은 이모님 4명을 각각 집에서 만났습니다. 일부러 아이의 낮잠 시간을 피해 약속을 잡고 아이를 어떻게 대하는지 지켜봤습니다. 그리고 4명 중 가장 아이를 대하는 태도가 맘에 드는 이모님에게 종일 보육을 부탁합니다.
종일 일할 시터 이모님을 구했다는 말에 친정 엄마는 해수에게 너무 미안해합니다. 해수 월급에서 이모님 수고비를 주고 나면 거의 남는 게 없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건강하지 않은 자신을 원망하며 미안해하는 엄마에게 해수는 씩씩하게 답합니다.
“윤서는 오빠랑 내 딸이에요. 어떤 식이든 우리가 책임지는 게 맞아요. 엄마는 손녀가 보고 싶을 때만 집에 오세요.”
다음날 지방에 사시는 시어머니에게 전화가 옵니다. 상황이 바뀌어서 종일 일하는 시터를 구했다고 하니 어머님은 너무 돈이 많이 들지 않냐며 육아휴직을 더 하거나 사돈이 좀 더 봐줄 수 없냐고 물으십니다. 평소 시어머니와 사이가 나쁘지 않았지만 실행하기 불가능한 조언에 해수는 단호하게 답합니다.
“어머님… 그건 힘들 것 같아요.”
복직 전날
해수는 못할 줄 알았던 복직을 앞두고 만감이 교차합니다. 자격이 안 되는 것도 아니고… 일을 못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제 자리로 돌아가려는 것뿐인데… 고작 그걸 위해 이렇게 많은 고뇌와 결심들이 필요하다니. 자신을 둘러싼 일상이 일 년 전과 완전히 달라졌다는 걸 또 한 번 깨닫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은 한 가지 있었습니다. 상황이 바뀌더라도 제일 중요한 건 ‘나 자신’이라는 만고의 진리입니다. 그리고 애써서 열심히 하지 않아도… 잘하지 않아도… 남들에게 칭찬받지 않아도… 내 존재 자체로 귀하고 소중하다는 걸요. 엄마라는 버릴 수 없는 막중한 의무감이 더해진 상황에서 예전과 똑같은 에너지로 똑같은 성과를 내려는 자체가 억지였습니다. 나를 귀하게 여기고 보호하고 끌어가는 것은 나밖에 할 수 없으니까요.
해수는 자신을 아끼기 위해 생활 패턴을 바꾸기로 합니다. 초보 엄마들이 교과서처럼 끼고 사는 육아책은 쳐다보지도 않고 다른 엄마들의 SNS를 보는데 시간을 쓰지 않습니다. 그리고 주부로서의 업무를 반 이하로 줄이기로 합니다. 청소도, 빨래도, 정리도 최대한 미루고 웬만하면 남편과 함께 합니다. 야간 자율학습 감독을 마치고 11시에 퇴근해 새벽까지 만들었던 이유식도 포기합니다. 이모님에 맡기거나 배달을 시켜 먹여도 아이는 문제없이 잘 자랄 테니까요.
복직 후 세 달이 지났습니다.
다행히도 새로 구한 이모님은 아이를 잘 봐주시고 윤서도 이모님을 잘 따르고 있습니다. 가끔 딸이 출근할 때 헤어지기 싫어 울먹일 때도 밝은 얼굴로 인사하고 집을 나섭니다.
친정엄마는 병원을 다니시고 운동을 시작하면서 건강이 많이 좋아지셨습니다. 야자 감독하는 날에는 이모님과 바통터치를 하고 윤서를 돌봐주시지만 여유가 생긴 낮에는 구에서 운영하는 시니어 학교에 다니시며 새로운 활력을 찾으셨습니다.
출근하는데 의의를 두기로 한 해수의 학교 생활도 순탄하게 흘러갑니다. 예전 같지 않은 나를 받아 들으면서 애써 잘하려고 하지 않으니 아픈 곳도 많이 줄었습니다. 야자감독을 하는 날에는 전처럼 잠깐이라도 윤서 얼굴을 보러 중간에 집에 가지 않고 온전한 나의 시간을 갖습니다. 정규 수업이 끝나자마자 사우나를 하고 좋아하는 영상을 보며 초밥을 먹고 얼음을 갈아 넣은 달디 단 커피를 들고 학교로 돌아와 감독을 시작합니다.
시간이 흘러 겨울방학이 시작되었습니다.
지난여름방학 때처럼 이모님을 쉬게 하지 않고 무조건 아침에 집을 나섭니다. 미리 예약해놓은 개인 PT를 받으러 피트니스 센터에 가서 열심히 운동하고 사우나도 합니다. 점심은 동네에서 혼자 간단하게 해결합니다. 오후에는 혼자 영화를 보러 가거나 카페에 앉아 학교 업무를 하거나 책을 보기도 하고요. 몇 번 남편 회사 앞으로 가서 둘이 오붓하게 점심 먹고 카페에 나란히 앉아 커피를 마시며 데이트도 합니다. 출근하지도 않으면서 아이와 함께 하지 않는다는 죄책감은 이제 없습니다. 이렇게 나와의 시간을 가지며 충전을 해둬야 육아라는 긴 여정을 버틸 수 있다는 걸 이제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 둘째 갖을까?”
윤서가 18개월 정도 됐을 어느 날.
단둘이 예쁜 카페에서 앉아 따뜻한 라테를 마시던 중 민석이 조심스레 묻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