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킹맘을 디자인해드립니다 (9)
“우리… 둘째 갖을까?”
남편의 조심스러운 제안은 해수가 그렇게도 어렵게 되찾은 평온한 일상을 또다시 혼란의 늪으로 빠트립니다.
둘째… 잊고 지냈던...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그 단어가 드디어 수면 위로 떠올랐습니다.
“엄마~ 난 나중에 결혼하면 아이 넷을 낳을 거야! 이왕이면 아들 둘, 딸 둘이면 좋겠는데~”
“넷? 아이구… 애 키우는 게 얼마나 힘든데~ 일단 하나 낳고 생각해!”
외동으로 자라 외로움을 많이 타던 해수는 엄마의 이런 반응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친정 엄마도 해수의 동생을 낳으려고 오랫동안 노력했기 때문에 해수가 아이를 많이 낳는다고 하면 반가워할 줄 알았으니까요.
그리고 이내 속으로 다짐합니다.
‘넷을 아니더라도 둘을 꼭 낳을 거야!’
하지만 뭣도 모르던 이 시절의 다짐은 이제 온데간데없습니다. 넷은 진작에 헛소리가 되었고 쉽게 생각했던 둘째조차 이젠 너무나 망설여집니다. 하나로도 이렇게 죄책감에 쌓여 허둥지둥 살아야 하는데… 하나가 더 생긴다면 어떤 혼란이 펼쳐질지… 도저히 그림이 그려지지 않습니다. 어렵사리 쟁취한 ‘엄마를 살리는 육아 세팅’에 둘째가 추가된다면...
아... 막막하기만 합니다.
“오빠는 왜 둘째를 가지고 싶은데?”
윤서가 일찍 잠든 밤. 해수는 민석과 둘째에 대해 솔직한 이야기를 해보기로 합니다. 어쨌든 두 사람의 인생에 중요한 결정이니 결혼생활과 육아에 다른 문제들처럼 배우자와의 대화가 우선입니다.
밤이 깊도록 둘은 서로의 생각을 나눕니다. 긴 대화 끝에 두 사람 모두가 꿈꾸는 가정의 모습 안에서 둘째를 발견합니다. 하지만 꿈꾸는 데로 살아가기에는 육아는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이라는 걸 이젠 알고 있습니다. 해수가 둘째가 생겼을 때 가장 걱정되는 것들... 체력, 정신적 고갈, 경력단절, 재정적 어려움 등에 대해서도 가감 없이 말합니다. 꿈꾸던 가정의 모습보다 육아로 인한 두려움이 앞선 해수에게 민석이 말합니다.
“다른 건 몰라도… 널 그 어려움 안에 혼자 두지는 않을게.”
그 말이면 충분했습니다.
“첫째가 돌이 지났다고? 이제 둘째 가져야겠네! 혼자는 외로워서 못써~”
“터울이 너무 지면 힘들어~ 키울 때 같이 어영부영 키워야지.”
“딸이 있으니 아들도 하나 있어야지~”
첫째가 돌이 지나자 해수 주변에 널려있는 오지랖퍼들의 원하지 않은 조언이 이어집니다. 둘째 생각이 전혀 없었다면 이런 조언에 아예 귀를 닫아버렸을텐데… 스스로 원했던 둘째라… 주변의 걱정 어린 조언들을 흘려보낼 수만은 없습니다.
민석과의 대화 후 둘째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된 해수는 오지라퍼가 아닌 해수보다 미래를 살고 있는 동년배의 의견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초등학교를 다니는 연년생 남매를 키우고 있는 고등학교 친구 수연에게 전화를 합니다. 수연은 법대를 나와 대학병원 법률팀에서 일하고 있는 워킹맘입니다.
“너… 계속 일할 거야? 그럼 둘째 낳아.”
“엥? 그럼 안 낳는 게 더 나은 거 아냐?”
“계속 일할 생각이면 하나보단 둘이 나아. 초반엔 고생 좀 하겠지만 어느 정도 키워놓으면 워킹맘에게 둘이 훨씬 좋아.”
해수는 친구의 논리가 완벽히 이해되진 않았습니다. 그래도 친구의 조언은 어른들이 무심코 내뱉는 구닥 따리 조언과 달리 훨씬 의미 있게 다가왔습니다.
둘째를 갖기로 결정한 후, 해수 커플은 피임을 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아기가 생기길 기다렸습니다. 첫째를 쉽게 만난 터라 맘만 먹으면 바로 임신될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가지려고 맘먹으니 아기는 좀처럼 생기지 않았습니다. 한 달… 두 달… 시간만 흘러갔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초조해지고 남들처럼 난임 시술을 받아야 하나 고민되기 시작했습니다.
생명은 계획한다고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닫습니다.
그렇게 일 년의 지난 어느 늦은 밤.
화장실 변기에 앉아 있는 해수의 손에는 임신 테스트기가 들려있습니다. 원래 생리주기가 불규칙하지만 이번엔 유독 늦어지고 있어 확인해보고 싶었습니다.
잠시 뒤… 테스트기에 흐릿하게 두 줄이 보입니다.
아… 임신입니다.
다음 주.
해수와 민석은 둘 다 오전 반차를 냈습니다. 테스트기로 확인하고 산부인과에서 임신을 확인받은 후 일주일이 지났습니다. 6주가 되었으니 처음으로 아기의 심장소리를 들으러 가는 날입니다. 첫째 때는 뭐가 뭔지 몰르는 상태로 처음 아기 심장소리를 들었었죠. 하지만 이제 어였한 경력직 부모로서 첫 심장소리를 함께 듣는 날을 기념하고 싶었습니다. 축하의 의미로 진료 후 산부인과 근처 해물찜 맛집에서 맛있는 점심을 먹을 예정입니다.
기다렸던 공연을 보러 가는 것처럼 한껏 들뜬 해수와 민석은 산부인과에 도착했습니다. 몇 년 전만 해도 민석에게 산부인과는 너무나 낯설고 불편한 곳이었는데… 이젠 익숙한 공간이 되었습니다.
해수는 긴치마로 갈아입고 검진실 산모 전용 의자에 앉습니다. 첫째 때 기억을 더듬어보면 먼저 아기 심장소리를 엄마에게 먼저 들려주고 아빠를 안으로 불렀었습니다. 그런데 의사 선생님은 초음파 기구로 한참을 여기저기 살펴보더니 해수에게 옷을 갈아입으라고 합니다. 예상치 못한 전개에 살짝 당황한 해수는 옷을 갈아입고 진료실에 있는 민석 옆으로 가서 앉았습니다.
“아… 아기가… 없네요.”
아기가… 없다고?? 둘은 의사 선생님의 말을 전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계류 유산입니다. 임신 초기에 빈번하게 발생할 수 있는 유산의 형태예요. 현재 아기는 없지만 아기집은 있기 때문에 빠른 시일 내로 수술을 하셔야 합니다.”
병원에서 나온 둘은 말없이 해물찜 집으로 향합니다.
그렇게 좋아하는 해물찜 앞에서 해수는 젓가락도 들지 못한 채 멍하게 앉아있습니다.
“초기지만… 이것도 출산한 거랑 다를 바 없어. 미역국 먹고 몸 따뜻하게 해야 해.”
수술한 날.
엄마에게 윤서를 맡기고 해수와 민석은 병원에서 바로 친정집으로 왔습니다. 친정집 부엌에는 미역국 한솥과 정성 가득한 반찬이 있습니다. 민석은 미역국을 데워 해수 앞에 놓습니다. 해수는 밥을 미역국에 말아 한입 물고는 어깨를 들석이며 울기 시작합니다. 심장소리도 못 들은 아이였지만 그 영혼은 해수에게 남아있는 듯합니다.
그렇게 반년이 지났습니다.
방학 때 운동에 빠졌던 해수는 어느덧 몸과 마음을 회복하고 있었습니다. 덕분에 몸무게도 출산 전으로 거의 돌아왔고요. 두 돌이 지난 윤서는 날이 갈수록 애교가 늘었습니다. 아이가 자라면서 육아가 조금씩 수월해졌고 어린이집을 다니기 시작하니 더 이상 이모님의 도움이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아쉽지만 정들었던 이모님과 작별을 하고 주말이면 세 식구가 놀러 다니며 안정된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따뜻한 봄날의 주말.
그날도 민석의 친구네 가족들과 외곽 유원지에서 코끼리 기차도 타고 돗자리에서 점심을 먹으며 봄날을 만끽했습니다. 집에 오는 길에 아까 먹은 김밥이 얹혔는지 해수는 속이 갑갑합니다. 차에서 뻗은 윤서를 침대에 누위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찬장 위에 넣어두었던 테스트기를 꺼냈습니다.
선명한 빨간 두 줄… 임신입니다.
유산 후에 둘째에 대한 기대와 욕심을 버렸던 터라 당혹스러웠지만 갑자기 너무나 행복했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키울지... 일을 계속할 수 있을지... 하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습니다. 감사하고... 또 감사했습니다.
2주 뒤.
민석과 해수는 산부인과에서 쿵쾅쿵쾅 선명하게 뛰는 둘째의 심장소리를 함께 들을 수 있었습니다.
하늘이 주신… 두 번째 선물이었습니다.
유산한 지 얼마 안돼 생긴 둘째는 아무 문제없이 건강하게 자랐습니다. 임신 초반엔 체중이 별로 늘지 않았지만 여전히 입덧은 없었습니다. 임신 중기부터 서서히 몸무게에 가속이 붙더니 막달이 되자 윤서 때와 같은 덩치를 갖게 되었습니다. 커피도... 라면도 잘 안 먹었던 첫째 때와 달리 둘째 임신 중에는 과하지만 않게 먹고 싶은 건 다 먹었습니다. 막달이 다 되어 몸이 무거웠지만 해수는 언제나 밝은 얼굴로 학교 복도를 성큼성큼 걸어 다녔습니다. 걱정되기보다는 그져 행복하고 감사했습니다.
자리에 와보니 앞자리에 앉은 수학과 주현지 샘이 반쯤 죽은 사람처럼 널브러져 있습니다. 현지 샘도 곧 출산 예정인데 임신 기간 내내 입덧이 심하고 우울증에 시달려 이제는 얼굴이 누렇게 뜨다 못해 거무스룸 해져 있습니다. 해수는 집에서 가져온 귤을 건네며 육아 계획을 물었습니다. 지방에 사시는 현지 샘의 어머니가 남에게 손자를 맡길 수 없다며 오랫동안 하던 일을 완전히 그만두고 아이를 봐주시기로 했답니다. 부유한 시댁에선 벌써부터 일을 그만두고 아이만 보라고 성화랍니다. 현지샘 앞날에 어떤 일들이 펼쳐질지 해수의 눈앞에 보이는 듯합니다.
둘째 제왕절개가 한 달 남은 어느 날 저녁.
퇴근 중이라는 민석을 기다리며 누워서 윤서가 노는 걸 바라보던 해수는 갑자기 아랫배가 칼에 찔리는 듯한 통증을 느낍니다. 자세를 바꿔봐도 통증은 계속되고 더 이상 참기 힘들어집니다. 친정엄마에게 급하게 윤서를 맡기고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향합니다.
산부인과 응급실로 가서 진통 주기를 확인하기 위해 기계장치들은 배 여기저기 붙이고 누워있는데 여러 가지 생각이 듭니다.
'아직 한 달 넘게 남았는데... 지금 출산하면 제왕절개 수술 부위가 터질 수도 있고...'
'아직 윤서에게 동생 낳으러 간다고 말도 못 했는데...'
한참 이런저런 걱정 잔치 중인 해수의 옆 침대에서 낮지만 강한 신음 소리가 들려옵니다. 다른 산모가 진진통을 겪고 있는 모양입니다. 그 순간 잊고 있었던 진통의 고통이 떠오릅니다. 아... 그걸 잊고 있었다니... 그러니 둘째를 낳을 생각을 용케 한 거겠지요.
"진통은 아니고... 치골 통증입니다.
노산이거나 둘째 임신 중에 벌어진 치골이 부딪치며 통증을 발행시키는 겁니다.
치료 방법은 딱히 없고... 출산하며 대부분 호전되니 출산 전까지 되도록이면 움직이지 마세요."
한번 해봤다고 모든 것을 예측할 수 없는 게 임신인가 봅니다.
"윤서야~ 축하해~~~ 너 이제 동생 생겨!!!"
임신 기간 내내 불어나는 배를 만져보게 하고 함께 목욕도 하며 동생의 존재를 인지해봤던 해수는 수술 전날 '동생 맞이 대작전' 피날레를 마련합니다. 윤서가 좋아하는 뽀로로 케이크에 '라푼젤' 인형까지 안기며 민석과 요란을 떨어봅니다. 한동안 엄마를 뺏긴 설움에 잠기겠지만 동생이라는 인생에서 가장 큰 선물을 만날 윤서는 축하받아 마땅합니다.
"안녕~ 세상에 나온 걸 축하해~ 우리 잘 지내보자~"
뱃속에서 막나왔지만 언니의 처음처럼 볼이 터질 것 같은 '은서'와의 첫 만남은 경험해본거라고 해서 그 기쁨이 작진 않습니다.
해수에게 또 하나의 평생 친구가 생긴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