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학년 5반...'
민경샘은 두번 접힌 종이를 조심스럽게 펼쳐봅니다.
2학년부 담임들이 모여 일년을 함께할 반을 뽑는 운명의 제비뽑기 시간입니다.
"5반이 누구세요?? 어.... 민경샘~ 여기 5반 명단있습니다."
부장님의 외침에 손을 든 민경샘은 26명의 아이들의 명단을 받았습니다. 작년에 수업을 해서 익숙한 이름도 있지만 낯선 이름이 더 많습니다. 아... 작년에 담임했던 학생도 2명이나 보입니다. 담임이 다음 학년을 함께 올라오면 연이어 만나게 되는 학생들이 생깁니다.
8명의 2학년 담임 선생님들을 서로의 명단을 보며 학생들에 대한 정보를 나눕니다. 성적이 우수한 학생, 인성이 훌륭한 학생, 일 잘하는 학생.... 에 대해서도 말하지만 앞으로 골치아플 학생들에 대한 정보를 더 자세히 나누게 됩니다.
"민경샘~ 5반은 어때요? 어디 보자....
음.... 수지 너무 괜찮은 학생이고... 민경이가 전교권 우수생에다가 일머리도 있어서 반장시키면 좋을꺼에요. 선영이도 알아서 하는 스타일이고... 아! 호민이는 달리기 진짜 빠른데... 체육대회때 계주는 걱정없겠어요.
음.... 요녀석들은 꼴초니까 항상 냄새나는지 잘 보시고... 이 친구는 매일 지각 할꺼에요.
아.... 재준이가 5반이구나... 아... 샘 좀 힘들겠는데... 소연샘! 재준이가 작년에 선생님 반이였죠?
올해 민경샘 반이네..."
작년에 같은 교무실이 아니라 친하지지 못했던 소연샘이 민경샘에게 다가옵니다.
"아... 샘... 올해 고생하시겠어요... 작년에 이녀석 때문에 많이 힘들었거든요..."
3월 첫날
한해를 보내야하는 아이들을 처음 대면하는 조회시간
종이 쳤지만 같은 반이 되지 못해 아직도 미련이 남은 아이들이 아직 복도에 남아있습니다.
저쪽에는 친구와 다른 반이 되었다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여학생이 울고 있습니다.
학생들에게는 새로운 담임선생님보다는 친한 친구와 같은 반이 되었는지가 훨씬 중요합니다.
민경샘은 칠판에 자신의 이름을 크게 적고 아이들을 둘러봅니다.
이미 많은 정보를 들었지만 아직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미리 들은 이야기가 도움이 되겠지만 그래도 최대한 편견없이 아이들을 대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아니... 솔직히는 제발 큰 사고 없이 무사히 한해가 지나가길 바라는 마음이 큽니다.
학생들도 담임이 낯설어서 그런지... 새로운 학생들에게 이미지 관리를 하고 있는건지
조회시간 내내 조용합니다.
하지만 이 고요함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선생님... 얘들이 자꾸 수군거리고 제 욕을 하는거 같아요."
오늘만해도 두번째... 씩씩거리며 재준이가 교무실에서 하소연을 합니다.
"얘들이 뭐라고 했는데?"
흥분한 재준이를 의자에 앉히고 차분히 묻습니다.
늘 분노와 억울함이 가득차있는 재준이는 숨을 헐떡거리며 말합니다.
"자꾸 저한테 장애인이라고... ADHD 약을 먹긴하는데... 그게 장애는 아니잖아요..."
학기초, 역시나 재준이는 수업시간부터 눈에 띄었습니다. 보통 학생들과 달리 수업에 열의가 있고 학업 능력도 꽤 좋은 편이였습니다. 다만 상황과 분위기와 맞지 않는 질문을 매시간마다 해서 민경샘을 당황하게 했습니다.
"어제 발사에 실패한 우주선이 작년 기종과 다른거에요."
"작년 영어 선생님은 이거 안하셨는데요."
"선생님 수업 준비 몇시간이나 하세요?"
"우리학교 급식은 겹치는 반찬이 너무 많아요."
당황한 선생님과 달리 다른 학생들은 이런 재준이가 이미 익숙한듯 보였습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재준이가 엉뚱한 질문을 할때마다 '또 저러네...'하는 표정을 지을 뿐이였지만 몇명의 학생들이 말꼬리를 잡아 재준이를 자극했습니다.
"병신 새끼"
"그게 무슨 상관이야"
"선생님! 시끄러워서 수업을 못하겠어요."
다른 학생들이 말과 표정으로 공격할때마다 재준이는 눈을 흘기며 씩씩 거렸습니다.
그리고 쉬는 시간에 담임 선생님을 찾아와 하소연했습니다.
그렇게 몇주가 흐른 어느 점심시간
학생들이 친구들과 수다를 떨며 배식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데 한쪽 편에서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들립니다.
"아악~~~~~~"
"박재준! 이 장애인 새끼가!"
한쪽에 마련된 교사 테이블에서 다른 선생님들과 이제 막 첫술을 뜨려던 민경샘은 비명 소리에 놀라 뛰어갑니다. 식당 한복판에 급식판과 음식이 뒤섞여 난장판이 되어 있었습니다. 재준이는 같은반 민철이를 죽일듯이 달려들고 있었고 주변 몇몇 학생들의 머리와 교복 위로는 그날 반찬인 떡볶이가 흘러 내리고 있었습니다.
"박재준! 그만해!!"
"이 새끼가 저보고 장애인이래요! 돌머리 주제에!"
민경샘은 분노에 찬 재준이의 팔을 붙잡고 일단 복도로 나갔습니다.
"재준아! 아무리 그래도 다같이 밥먹는 식당에서 식판을 던지면 어떻게! 다른 친구들까지 다 피해를 봤잖아!"
"선생님이 뭘 알아요! 저 새끼가 맨날 장애인이라고 놀리고... 왜 저한테만 그래요!"
화를 멈출 수 없는 재준이는 더욱 씩씩거리며 민경샘에게 달려들었습니다.
"민철이가 잘못한건 맞아! 하지만 너가 이렇게 흥분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면 선생님은 너를 먼저 지도할 수 밖에 없어. 너만 미워해서 그런게 아니야."
씩씩거리던 재준이는 어깨를 들석이며 울기 시작했습니다.
재준이 어머니에게 학교에 있기가 힘들 것 같아 데리고 가달라고 연락을 하고
식당으로 가 재준이가 벌린 일을 수습했습니다.
뒤늦게 달려온 소연샘이 함께 정리를 도우며 말했습니다.
"휴... 그래도 크게 다친 학생은 없었죠? 작년엔 자기 놀린 학생에게 교실 뒤편에 걸려있는 거울을 던져서... 난리가 났었거든요. 다친 학생 부모가 고소한다고 소리소리 지르고... 또 어떤 돌발 행동을 할지 몰라 가슴이 조마조마했는데... 올해도 별반 다를게 없네요..."
그 뒤로도 재준이의 폭력적인 돌발행동은 계속됐습니다.
영어 수업 중 자극하는 말을 듣자마자 재준이는 마시고 있던 생수통 뚜껑을 열더니 교실에 뿌리기 시작했습니다. 가만히 앉아 있던 여학생 3~4명이 느닷없이 물세례를 받고 교복이 홀딱 젖어 버렸습니다. 깜짝 놀란 민경샘이 제지하자 재준이는 들고 있던 빈 물통을 바닥으로 던지며 거칠게 저항했습니다.
며칠 뒤 과학 시간에는 들고 있던 핫팩을 갑자기 찟더니 안에 들어 있던 철가루를 책상에 뿌리고 혼자 욕을 해서 과학 선생님에게 연행되어 교무실로 끌려 왔습니다.
민경샘이 수업이 없는 시간에 5반 앞을 지나가다 교실 앞에서 사회 선생님에게 소리를 지르는 재준이를 보았습니다. 다가가 이유를 물으니 수행평가 성적이 이상하다고 항의 중이라고 했습니다. 차근차근 설명하는 사회 선생님에게 공정하지 않다고 계속 소리를 지르며 수긍을 하지 않아 성적을 확인해 보니 재준이의 사회 수행 100점이였습니다. 다른 친구들의 성적에 대한 항의 중이였던 것이였습니다. 나중에 물어보니 정작 점수를 잘 못받은 학생들은 점수에 크게 불만이 없었습니다.
반 대항 보드게임을 하는 주간이였습니다.
루비큐브를 하고 있는 교실에서 큰 소리가 들려 뛰어가 보니 바닥에 보드게임 조각들이 흩어져 있고 재준이가 역시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있었습니다. 반대편에 앉아 있던 다른반 여학생은 겁에 질려 울먹거리고 있었구요. 진행을 맡은 선생님에게 물어보니 게임 규칙이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 다르다며 갑자기 앞에 있는 의자를 발로 차며 책상위에 있는 큐브들을 바닥으로 던졌다고 했습니다. 앞자리에서 떨고 있던 여학생의 어머님은 그날 오후 민경샘에게 전화해 재준이가 혹시나 찾아오거나 보복하지 않게 지켜봐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하루가 멀다하고 재준이가 저지른 일을 수습하느라 민경샘의 새학년은 초반부터 엉망이 되어 갔습니다.
7월 1학기가 마무리될 무렵
학부모 상담 주간에 찾아온 재준이 어머님에게 학교 생활을 알려드리고 외부 기관에서의 상담을 요청했습니다. 죄송한 얼굴로 이야기를 열심히 듣던 재준이 어머님은 상담을 마무리 하려느느 민경샘에게 마지막으로 물었습니다.
"근데... 선생님... 1학기 종합 성적에서 재준이가 전교 몇등인가요?"
순간 당황한 민경샘은 잠시 숨을 고르고 분명하게 대답했습니다.
"어머님... 그러지 마세요...."
"재준이가 초등학교때부터 ADHD 약을 먹고 있는데.... 시험이 다가오면 일부러 많은 양을 먹이시는거 같아요. 그 약이 순간 집중력을 높여준다고 하더라구요. 강남에서는 이미 집중력 약으로 유명하잖아요."
한달전 소영샘이 했던 말이 떠올랐습니다. 처음엔 소영샘이 잘못들은 거겠지... 라고 생각했습니다.
끊임없는 질문과 돌발적인 과격한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던 민경샘은 그 순간부터 재준이가 달리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여름방학을 앞둔 어느 조회시간
방학에 대한 기대에 들뜬 아이들에게 민경샘이 물었습니다.
"너희들 방학에 뭐할꺼니? 게임도 실컷하고 늦잠도 자고... 놀 시간도 많아서 좋겠다."
"네에~~~"
신나서 소리치는 아이들 사이로 재준이가 민경샘을 쏘아보고 있었습니다. 민경샘과 눈이 마주치자 분노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습니다. "제가 방학동안 얼마나 힘들지... 선생님은 아세요?"
쌩뚱맞은 외침에 어떻게 반응해야할지 몰라 어떠한 대답도 할 수 없었습니다.
개학 후 재준이가 방학내내 대학교 영재교육원에서 운영하는 '로봇 캠프'에 참여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과학고를 진학할 학생들이 필수로 참여한다는 캠프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