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움, 그 당연함에 대해
가족과 함께 있는데, 연인과 함께 있는데, 친구와 함께 있는데,
나는 왜 외로운 것일까...
사람들은 살아가며 대수롭지 않게 외롭다는 감정을 내비친다.
이 외로움의 정체는 무엇일까?
외로움의 사전적 의미
"홀로 되어 쓸쓸한 마음이나 느낌" (출처 - 표준국어대사전)
사전적인 의미로만 보았을 때 혼자가 아닌 함께 하고 있을 때 이런 감정을 느끼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사람은 어떤 상황이라도 외로움을 느껴왔기에 사전적인 의미와는 조금의 괴리가 있게 느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사람의 특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사람은 고유의 의식을 가지고 있고, 보통의 경우 하나의 인격을 가지고 살아가게 된다.
이때 본인이 의식하는 자신의 개수는 하나가 되며, 본인은 독립적인 존재로 있을 수밖에 없게 된다.
여기서 사람들의 착각이 일어나는데, 그것이 바로 시각이 주는 착각이다.
개개인의 독립된 주체들이 모여 한 집단을 형성하는 것을 사회적으로 함께 한다고 이야기하는데, 엄밀히 이야기하면 함께 한다고 볼 수 없다. 사람의 눈으로 보이기엔 바로 옆에 타인이 존재하면 함께 한다는 존재감을 느끼게 되어 같은 개체에서 오는 동질감과 안도감을 느낄 수는 있지만, 눈만 감아 보면 현실을 깨달을 수 있다.
"나"는 태어난 이래로 지금까지 쭉 혼자였다는 것을.
그렇기에 외로움의 특성인 혼자가 되는 전제 조건은 삶을 사는 평생 동안 완벽하게 이루어져 있다고 볼 수 있다. 사람이 외로움을 느끼는 것은 그렇기에 너무나도 당연하다.
자. 이제 여기서 이야기해야 하는 많은 사람들이 놓치고 있는 부분이 하나 있다.
위에 이야기한 외로움의 전제조건을 타고난 우리 인간들은 외로움을 느끼며 살아가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며 살아가면 되는데, 사람들은 이 외로움에 대해 이질적이며, 당연하게 느끼지 않기 때문에 당연함 속에서 받지 않아도 될 상처를 계속 받고 있는 것. 이 부분을 받아들인다면 훨씬 자연스러운 감정을 받아들이며 자연스러워질 기회를 가질 수 있을 않을까 생각이 된다.
"외로움을 이길 수는 없지만 당연함으로 받는다면 훨씬 자연스럽고, 편안한 삶을 누릴 수도 있지 않을까?"
여기서 문제
"과연 외로움을 당연함으로만 받아들이는 것이 맞는가?"
필자의 생각은 그 당연함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으나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속이거나 중화할 수 있는 방법은 있다고 생각한다. 방법은 개인과 또 다른 개인 사이의 연결력과 연관이 있다. 사람과 사람이 단순히 만난다고 해서 연결이 되는 것은 아니다. 연결됨의 전제 조건은 사람 간의 관계에서 의심하지 않을 수 있을 만큼의 끈끈한 "믿음"이다. 이 믿음은 두 가지의 상황으로 나누어지는데 개인이 상대방을 믿는 믿음을 믿는 것과 상대방이 개인에게 주는 믿음을 믿기로 하는 그 마음을 믿는 믿음으로 이렇게 두 가지의 믿음으로 나눌 수 있다. 이 둘 중 무엇을 선택하는 것은 상관이 없지만 무엇이든 선택 후 조건이 흔들리게 된다면 개인 또한 다시 외로움과 불안함의 감정이 뒤섞여 휩쓸리게 될 것이다. 그래서 안전성이 중요하게 여겨지는데, 믿음의 안정성의 결론 점에 이르게 되면 사람들은 하나의 행위에 이르게 된다. 그것은 바로 "결혼"이다.
결혼은 일반적으로 남자와 여자가 삶을 같이 살아가기 위해 서로의 믿음을 약속하는 행위라고 볼 수 있다.
그 약속을 굳이 하는 이유는 믿음의 불확실성 때문이라고 본다.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믿음을 견고하게 하면 할수록 외로움의 감정을 속이던, 중화시키던 할 수 있는데, 결혼이라는 장치는 서로의 믿음을 제도적으로 강화하기 위한 하나의 조약으로써 서로의 외로움의 책임을 서로에게 전가해주는 행위로 본다.
이렇듯 사람들은 외로움을 느끼며 살아가지만, 사람이 가진 개인적이고, 독립적인 특성 때문에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할 문제로 보인다.
마음먹기에 따라 외로움이 상처가 되기도, 인생의 당연한 부분이 되기도 한 외로움.
당신은 외로움은 어디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