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리오가 완성되면 엄지손톱 크기의 종이에 빠르게 장면을 그려보는데 이 그림들을 '썸네일'이라 부른다.
50번째 엉망인 썸네일
시나리오를 기반으로 작은 그림을 붙였다 떼고 순서도 바꿔가며 자연스럽게 샷(장면)들이 이어질 수 있도록 만드는 작업으로 그림의 완성도는 무지막지하게 엉망이다. 심지어 작업을 하다 다음날 아침이 되면 스스로도 못 알아볼 정도다. 그래서 웬만하면 하루에 스토리의 처음부터 끝까지 그려보고 다음날 다시 수정하며 다듬어 간다. 그림은 대충 그리지만 머릿속으로는 이미 완성된 장면들을 상상하기 때문에 한 편의 애니메이션을 완성한 기분이 들어 뿌듯하다. 하지만 갈 길이 멀다는 것을 깨닫고 곧 허무해지기도 한다.
50번째 엉망인 썸네일의 스토리보드 버전
썸네일 작업이 끝나면 좀 더 자세한 계획을 담은 그림을 그리게 되는데 이를 '스토리 보드'라 부른다. 아직 완성과는 한참 멀었지만 샷에서 중요한 요소가 무엇인지 미리 파악해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사진에 나오는 샷은 무리에 어울리지 못해 외롭게 서 있는 주인공의 감정을 빛과 어둠의 대비를 통해 강조하여 보여준다는 목적을 가진 샷이다.
<8월의 크리스마스의 한 장면>
영화나 책들에서 레퍼런스 찾아보고 영감을 얻기도 한다. 예시 이미지는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정원의 친구 어머니 장례식에 간 짧은 샷인데 어느 장례식 장면보다 강렬하게 다가왔다. 보통 장례식이라면 검은띠가 둘러진 영정사진과 국화꽃, 향이 피어오른 모습, 울고 있는 사람들 장면 등이 그려지지만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는 다른 묘사 없이 장례식 장 입구에 서 있는 정원의 모습이 전부다. 빛과 어둠의 대비된 이 단 한 컷으로 이승과 저승의 경계의 장례식장 모습이 잘 표현되었다 느꼈다. 언젠가 나도 써먹을 수 있는 좋은 샷이라고 생각되어 기억해두었다 내용은 다르지만 비슷한 대비가 필요한 샷에서 적용하게 되었다.
이렇게 완성된 스토리보드를 연결해 처음 영상으로 만들어 보는데 이를 '스토리보드 릴'이라 부르며 사운드와 대사 등도 이때 들어간다. 개인적으로 이 단계가 가장 재미있는데 이유는 사운드가 추가되기 때문이다. 사운드 없이 이미지만 보면 딱히 감정이 느껴지지 않던 장면도 사운드나 음악이 들어가면 완전히 달라진다. 그래서 릴을 만들 때 최대한 내가 상상한 사운드를 여기저기서 찾아 레퍼런스로 넣는 편이다. 그리고 이렇게 하면 나중에 사운드 디자이너와 일을 할 때 소통이 잘되는 이점이 있다.
보통 기획 제작과정이라고 하면 컨셉아트 -> 썸네일 -> 스토리보드 -> 스토리보드 릴 -> 애니메틱 릴 -> 프리비즈/레이아웃 릴단계를 거치는데 규칙처럼 순서대로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유연하게 작업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기획 단계란 머릿속으로 상상했던 흐릿한 이미지들을 현실로 가져오는 첫 과정으로 아무리 생각해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는 장면들이 생기게 되는데 해결되지 않는 것을 계속 붙잡고 있기보다는 잠시 묻어두고 다음 단계로 진행하는 것이 도움이 되었다. 묻어두고 가끔 생각하다 보면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경우가 많았고 어차피 릴을 제작하고 있는 도중에도 다시 처음 썸네일 단계로 돌아가야 하는 반복적이고 수정이 많은 긴 시간을 요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나 또한 이번 작품을 만들면서 스토리가 조금 부족한 단계였지만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아 일단 스토리보드와 릴 작업에 들어갔다. 작업하면서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고 다시 썸네일 단계로 돌아가 수정하는 과정을 거쳤다. 이렇게 작업을 하다 보니 일정이 늦춰져 스트레스를 받곤 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더 좋은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싶다는 욕심이 만들어낸 자연스러운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답이 없기에 수 없는 고민이 필요하지만 나만의 답을 만들어 간다는 점이 재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