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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우 Dec 07. 2017

나의 창업 이야기 Part 1 - 어린 시절의 나

2017년 12월 7일에 돌아본 내 첫번째 이야기

같은 글의 하이라이팅 된 버전. 라이너는 이렇게 쓰는 겁니다.


내 이름은 김진우다. 나는 인터넷에서 하이라이팅과 메모를 남길 수 있는 서비스인 LINER(http://getliner.com)를 개발한 스타트업 아우름플래닛의 대표이사로 일하고 있다.


'조성문의 실리콘밸리 이야기' 블로그에서 가져왔다. (http://sungmooncho.com/2016/07/04/liner/)


LINER(라이너)는 전체 사용자의 90%가 해외 사용자일 정도로 한국보다 해외 특히 미국에서 많이 사용되고 있는 서비스인데, 혹시 이 글을 읽는 사람들 중에서 아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어찌 되었든 내가 하는 일에 대해서는 뒤에 설명하기로 하고, 먼저 이 이야기를 진행시키도록 하겠다.


맨 처음에는 기업가 정신이란 무엇인지에 대해서 막연히 생각해볼 기회가 생겨서 고민해보다가 이 글을 쓰게 되었다. 기업가 정신, Entrepreneurship, 말이 한글이든 영어든 나에게는 다 직관적으로 와 닿지 않았다. 누구는 기업가 정신이 타고나는 것이라고 하고 누구는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하니 생각할수록 애매모호한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공대 출신인 나는 이런 애매함에 대한 생리적인 혐오감을 사실 조금 가지고 있다.) 이런 단어는 보통 자기가 정의하기 나름이기에 나는 내 나름대로 이 단어를 정의해보려고 한다.


어차피 내가 정의하기 나름인 거 내가 어떻게 안 죽고 여기까지 굴러오게 되었는지를 지금부터 생각해보려 한다. 조금 건방지긴 하지만 그래도 지금의 내가 기업가라고 불릴 수 있다면(아니면 최소한 내가 진정으로 기업가가 되기를 꿈꾸고 있다면), 내가 왜, 어떻게 여기까지 굴러오게 되었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나만의 기업가 정신을 정의하는데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제 기업과 창업에 관한 나만의 이야기를 시작해보려 한다. 이 이야기는 내가 기억하는 가장 오래전 순간이라고 할 수 있는, 내가 미국에 있던 때로부터 시작한다.



1998년. Inception.

나는 어디에서 나의 출신에 대해 소개할 때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많이 했었다.


“부산 출신 보스턴 남자입니다.”

솔직히 반은 그냥 남들과 다르고 싶은 마음에 까부는 거다. 부산에서 태어나긴 했지만 태어나서 3달 정도 있었다고 하고, 보스턴에서 어렸을 적에 살긴 했지만 2년 내외의 그리 길지는 않은 시간 동안만 있었기 때문이다.


이 말이 완전 까부는 게 아니라 반은 까부는 것이라고 하는 이유는, 만 27년 된 내 인생에서 2년이라는 시간이 차지하는 비율은 10%가 안되지만, 내 정신에서 차지하게 된 비율은 70%는 되는 것 같기 때문이다.


내가 미국에서 살았던 즈음 미국의 창업 생태계는 많이 뜨거웠다. 빌 게이츠는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되었고 스티브 잡스는 막 애플에 복귀했고 아마존은 막 상장했다. 애플의 반투명 iMac으로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에서는 게임을 했다. 포켓몬이 출시되어 전 세계적 대히트를 쳤고 디지몬도 나오더니 초대박을 터뜨렸다. 그래서였을까, 아버지는 당시 미국 나이로 7살이던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벤처 창업해라”

나는 그 상황이 지금도 기억이 난다. 도로를 달리던 차 안에서였는데, 어떤 락 음악이 나오고 있었고 아버지가 그 얘기를 하셨다. 그래서 어린 나는 ‘벤처 창업이 뭐야?’라고 물어봤는데 아버지는 나에게 ‘어드벤처 같은 거야’라고 하셨다. 7살짜리 꼬마 아이한테 이 세상에 어드벤처만큼 흥미로운 게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래서 또 물어보았다. ‘지금 나오는 락 음악처럼 신나는 거야?’. 그랬더니 ‘응 이렇게 신나는 거야.’라고 하셨다. 우리 아버지는 내가 지금 벤처 사업을 해도 반대하면 안 되신다. 이 모든 일의 인셉션은 분명 거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원래 반대 안 하신다. 아버지께서 이 글을 보시고 내가 반대한 적 있느냐고 연락이 와서 분명히 밝혀둔다…)



2000년. 프로그래머를 꿈꾸는 초등학생.

내가 한국으로 돌아온 것은 1999년 후반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에서는 컴퓨터를 가르쳤었다.(초등학교 3, 4학년한테 컴퓨터를 가르치다니…) 그 당시 옆에 있던 애들이랑 피카츄 배구를 수업시간에 얼마나 많이 해댔는지 모르겠다.

충격적이었던 온라인 게임

그러다가 하루는 최근 출시된 게임이라는 포트리스를 하게 되었는데 포트리스는 정말 충격 그 자체였다. 옆에 있는 사람과 게임을 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모르는 사람과 게임을 하는 것은 그때 처음 해봤다. 그 게임을 시작으로 바람의 나라, 어둠의 전설, 퀴즈퀴즈, 아스가르드, 메이플 스토리, 마비노기 뭐 온라인 게임을 정말 엄청나게 많이 했었다. 당연히 컴퓨터랑 점점 더 가까워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하루는 우리 부모님이 나에게 컴퓨터 과외 선생님을 한 분 소개해주셨다. 그런데 또, 나랑 이 컴퓨터 선생님이랑 엄청나게 친해져서 나는 컴퓨터 앞에 더 많이 붙어있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초등학교 진로 희망을 적는 날이 왔는데 이렇게 적어 넣게 되었다.


“컴퓨터 프로그래머”


지금 돌이켜보면 너무 놀랍게도 실제로 나는 스타트업을 하게 되었고,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되었다. 뒤에 계속 얘기가 이어지겠지만 내 인생 한정으로는 정말 '말하는 대로 된다'는 것이 거의 맞아왔다. 그래서 이게 우연인지 운명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의 나는 오히려 이걸 이용한다. "5년 안에 뭘 이룰 거예요", "이번 6월에 뭐가 될 거예요", "미국 가서 이런이런 사람을 만날 거예요" 같은 식으로 정말 이루고 싶은 목표는 뱉고 보게 되었다.



2004년. 아저씨 왜 사세요?

보통 이런 이야기의 뒤에는 이렇게 게임에 빠진 중학생이 독학으로 프로그래밍을 익혀서 엄청난 무언가를 개발해내는 미담이 이어져야 마무리가 깔끔하게 되는데, 내 이야기는 이런 미담으로 끝나지는 않았다. 나는 그냥 나중에 프로그래머가 되고 싶은, 이번에는 노래 부르기를 엄청나게 좋아하는 중학생이 되었다.


이런 미담이 이어져야 했는데 내 이야기는 임재범으로 이어졌다.


지금은 어떤 노래가 중학생들 사이에서 유행인지 모르지만 내가 중2병에 걸려있던 때에는 임재범의 고해가 남학생들 사이에서 엄청나게 유행이었다. 집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고해를 불러대고 있으니 우리 부모님께서는 내가 임재범의 팬인 줄 알고 임재범 콘서트를 다녀오라고 나에게 티켓 두 장을 건네주셨다. 그 티켓들을 들고 주변에 자랑을 엄청 해댔는데 이게 웬걸, 임재범이 돌연 콘서트를 취소해버렸다.


그래도 크리스마스였는데 좀 너무했다.


솔직히 임재범의 엄청난 팬도 아니었던 나는 그렇게 실망하지는 않았었는데 우리 부모님께서는 뭔가 내가 좀 안되었는지 벤처 사업가 친구랑 점심이나 먹으러 가자고 했다. 내 컴퓨터에서 실제로 이 사람의 프로그램을 쓰고 있었고 이 프로그램을 만든 사람이 부모님 친구인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 아저씨에 대해서 나 혼자 좀 찾아봤었는데 그때까지 이 분의 행적이 꽤나 멋있었다. 그래서 평소에 멋있다고 얘기를 가끔 했고 결국 콘서트 대신(?)으로 점심 자리를 잡아주셨던 것 같다.


그 당시 나는 사춘기가 심하게 와있어서 매사에 부정적이고 짜증을 쉽게 내면서도 정작 나서서 뭘 해결하는 일은 없는 중2병 걸린 아이였다. 그냥 진짜 노래만 열심히 불러댔었다. 그거 빼고는 뭐 하는 것도 없으면서 조금만 심사가 뒤틀리면 불량하게 ‘왜요?’, ‘어차피 다 의미 없잖아요’라는 식으로 세상을 비판하는 척하면서 살고 있었다. 그날도 그랬었다. 실제로 본 것은 그 날이 처음인 아저씨였지만, 그리고 나름 멋있다고 생각하던 아저씨였지만, 앞에서는 센 척했다.


“아저씨는 왜 살아요? 어차피 다 의미 없을 수도 있잖아요.”


지금 생각해보면 이 아저씨는 너무나도 뻔한 이야기를 했다.


“내 흔적을 남기기 위해 산다. 만약 왜 열심히 살아야 하는지 묻는다면, 항상 열심히 살지 않으면 흔적을 남길 수 있는 기회가 왔을 때 기회를 놓치게 되기 때문이다.”


사실 중학교 2학년일 때 이 말 한마디에 내가 엄청나게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충격은 한참 뒤에 왔다. 이 아저씨는 자세한 내용은 여기에 있다면서 나에게 본인이 쓴 책을 선물해주셨다. 나는 틈이 날 때마다 이해는 안 되지만 이 책을 무작정 읽어댔고 결과적으로는 한 5번은 처음부터 끝까지 읽은 것 같다. 나이가 한두 살 들면서 고등학교 2학년쯤 되었을 때 서서히 충격을 받았다. ‘우리 부모님과 같은 교육을 받은 사람인데 이렇게 다른 길을 걸을 수도 있는 것인가? 길이 주어졌다고 그 길을 걷는 것이 다가 아니라 내가 내 길을 만들어서 걸을 수도 있는 것이구나.’


이 아저씨가 할 수 있었다면, 나도 분명히 할 수 있다.


이렇게 초등학생일 때에는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진로 희망이었지만, 이때부터는 단순한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아니라, 프로그래밍으로 내 길을 만드는 방법 중 하나인 벤처 창업을 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스마트폰 바탕화면에 결심 같은 것을 적어놓듯이 내 필통에다가 분명히 보이도록 붉은 색연필로 적어두었다.

“김 회장”


나는 내가 창업한 그룹의 회장이 되겠다는 꿈을 그때 처음 꾸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이 아저씨가 누군지는 나의 창업 이야기에서 '전혀' 중요한 부분이 아니지만 이 아저씨를 지금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고 나도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재미있던 기억이라서 아래에 공개한다.

(참고로 나는 정치에 관심 없다. 이 말도 밖으로 뱉었으니 운명적으로 지켜질 것이다.)


임재범 콘서트 티켓 대신에 갖게 된 티켓




중, 고등학교 이야기의 뒤에는 나의 대학교 이야기를 시작으로 내가 어떻게 지금의 일을 하게 되었는지 이어서 이야기를 풀어갈 것이다. 쓰다 보니까 내용이 너무 길어져서 몇 개로 끊어서 글을 쓰는 것이 쓰기도, 읽기도 편할 것 같다.


‘나의 창업 이야기 — Part 2’는 일하다가 토할 것 같을 때(지금인가...) 끄적이려 한다.


마지막으로,

라이너 팀에서는 Android, iOS, Web Client 개발자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jinu@getliner.com으로 간단한 포트폴리오와 이력서를 보내주시면 되게 재미있는 미래가 눈앞에 펼쳐질지도 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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