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효연 작가
1945년 일본 히로시마에서 살아 돌아온 한국인의 삶을 카메라로 포착한 김효연 작가를 만났다.
“오늘은 어떤 일이 펼쳐질까. 요술공주 밍키 밍키 밍키.” 경남 합천에 사는 소녀가 1980년대 만화 <요술공주 밍키>의 주제가를 부른다. 같은 지역의 한 할머니는 1943년에 발표한 일본 군가 ‘젊은 독수리의 노래’를 흥얼거린다. 김효연 작가는 부산항에서 일본 시모노세키항까지 배를 타는 내내 촬영한 바다 물결에 두 사람의 노래를 더한 영상 작품 ‘세이렌’을 선보였다. 오래된 만화 주제가와 일본 군가, 항해 풍경은 어떤 연결점이 있을까? 궁금한 마음을 안고 서울의 한 전시장으로 김효연 작가를 만나러 갔다.
한 사람의 사정이 아닌 모두의 역사
2017년 가을, 북한의 미사일 발사를 기점으로 핵무기 관련 기사가 쏟아졌다. 타지에서 생활하는 김효연 작가가 걱정됐던 어머니는 “만약 전쟁이 나거든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와라”라는 전화를 걸어왔다. 처음엔 지나친 염려라고 여겼으나, 마음 한편에선 전쟁이란 단어가 점점 부피를 키워 갔다. 그때부터 윗세대를 스쳐 간 전쟁의 상흔을 찾아 헤맸다. 그러다 합천에 1945년 일본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 피해를 본 한국인 수십 명이 생활하는 합천원폭피해자복지회관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김 작가의 발걸음이 그곳으로 향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히로시마가 고향인 그의 어머니 쪽 할머니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김효연 작가가 기억하는 할머니는 한국어가 조금 서툴렀고, 종종 부엌에서 일본 노래를 부르곤 했다. 할머니는 한국인 강제징용 노동자였던 할아버지를 만나 1945년 이전에 부산으로 넘어왔다. 이후 고향엔 한 번도 가지 않았다. 히로시마에 살던 할머니의 가족 중에서는 작은오빠가 원폭 피해자인 동시에 유일한 생존자가 됐다. 이런 사정은 그저 가족사일 뿐이었다. 그가 합천원폭피해자복지회관의 존재를 알기 전까지는.
한국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원폭 피해자가 많은 나라다. 1945년 히로시마엔 10만 명이 넘는 한국인이 거주했고, 그들 중 대부분이 합천 출신이었다. 종전 이후 귀향한 이들의 역사는 오늘로 이어진다. 우리 곁의 누군가는 원폭 피해자 1세대, 2세대, 3세대, 4세대라는 숙명을 안고 살아간다. 합천원폭피해자복지회관 수장고에는 5000여 개의 원폭 피해자 신상 자료 원본이 보관되어 있다. 이런 사실은 김효연 작가에게 커다란 충격을 안겨 주었다. 자신이 얼마나 무지했는지를, 할머니가 홀로 감당해야 할 개인의 서사가 아니었음을 깊이 깨달았다. 그러나 무얼 해야 할지 몰랐다. 아니, 정확히는 무얼 해도 안 될 것 같았다. 엄청난 무력감이 그를 덮쳤다. 그렇다고 가만있을 순 없었다. 무작정 카메라를 둘러멘 그는 합천에 얼굴을 내비치기 시작했다. 할머니와 비슷한 구석이 많은 어르신들의 일상 속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모습을 사진으로 선물하고 싶었다. 이후 지금까지 합천과 히로시마에 거주하는 이들의 삶을 프레임에 옮기는 중이다.
76년 전 그날을 기억하는 일
합천에서 만난 한 할아버지는 그 옛날 히로시마 거주지 주소를 정확히 기억했다. 김효연 작가는 거동이 불편한 그 대신 일본으로 향했다. 교통편은 일부러 배를 선택했다. 수십 년 전, 작은 배 한 척에 의지해 망망대해를 건너 타국에 갔다가 커다란 슬픔을 안고 돌아오는 이들에게 바다는 어떤 모습일지 상상했다. 이때 촬영한 영상에 세대가 다른 두 사람의 노래를 더한 작품이 ‘세이렌’이다. 배 종착지인 시모노세키항에서 히로시마까지는 철도를 이용했다. 그 시절, 부산과 히로시마를 오가는 여정을 똑같이 밟은 것이다. 그렇게 도착한 히로시마엔 다행히 할아버지의 집터가 남아 있었다. 집 형태는 바뀌었어도 주소는 그대로였다. 작가가 보여 준 진심 어린 태도에 여러 어르신과 그 가족들은 조금씩 마음을 열었다.김효연 작가는 한 사람의 아픔이 아니라 인생에 초점을 맞춘다. 그래서인지 그의 사진 속 사람들은 편안해 보인다. 동시에 보는 이가 짊어져야 할 부담감도 덜어냈다. 더 많은 사람이 이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김 작가는 계속해서 합천과 히로시마를 포함해 우리 주변에 남은 그날의 흔적을 기록해 나갈 것이다. 현재진행형인 그날의 이야기가 그의 손길을 거쳐 또 하나의 역사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