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가 권치규는 사람의 내면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 안에서 발견한 욕망과 희망을 조각으로 옮겨 냈다.
봄이 오면 겨우내 메말랐던 가지에 하나둘 싹이 나기 시작한다. 눈 깜짝할 사이, 울창해진 나뭇가지가 산들바람에 너울거리며 안부를 건넨다. 그리고 여름, 가을, 겨울까지 한 바퀴 돌고 나서 다시 봄이 온다. 누군가는 이런 자연의 흐름을 예사롭게 넘기지만 조각가 권치규는 그러지 않았다. 그에겐 분명 대수로운 일이었다. 그는 자연이 지닌 힘에 집중했다. 웅크렸다가도 금세 일어나는 능력, ‘회복탄력성(resilience)’을 작품에 불어넣었다.성인 남성 평균 키를 훌쩍 넘는 약 2미터 높이의 타원형 나무 조형이 옹기종기 모여 숲을 이룬다. 권치규 작가가 지난해 12월 회복탄력성을 주제로 선보인 ‘숲’ 시리즈의 ‘서정적 풍경’이란 작품이다. 미루나무를 본뜬 나무 조형을 가까이 들여다봤다가 어느 틈엔 멀리 떨어져 감상한다. 검정과 초록, 연두색이 어우러진 나무 조형은 빛과 각도에 따라 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어두웠다가도 반짝 빛이 난다. 특히 단단한 땅을 뚫고 솟아나는 새싹을 닮은 어여쁜 연두색이 마음을 누그러뜨린다. 차가운 재질의 스테인리스스틸을 사용했음에도 온화한 기운이 느껴지는 이유다. 권 작가는 색이란 정체성이고, 연두색이야말로 자신을 드러내는 색이라 했다. “시골에서 나고 자란 데다 4월생이에요. 사람도 자연처럼 주기가 있다고 생각해요. 봄에 태어나서인지 이때 기운이 가장 좋아요. 봄의 전령인 새싹은 연두색이잖아요. 저를 나타내기에 이만한 색이 없어요.”
희망의 기운으로 완성한 조각
경북 상주의 한 시골, 소년 권치규는 일찍이 미술에 재능을 보였다. 초등학생 때부터 크고 작은 대회에 나가 상을 받았다. 미술부가 유명한 함창고등학교에 진학하고, 서울 홍익대학교 조소과에 입학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물론, 그 안에 치열한 시간이 있었음은 당연지사다. 작가로 이름을 알리고 싶던 그는 꿈을 꾸고 이루고, 또 다른 꿈을 꾸는 일을 반복했다. 끊임없이 염원하고 성취했다. 그에게 목표란 살아가는 원동력이었다. 그 결과 대학 졸업반인 1991년과 1992년엔 MBC 한국구상조각대전 특선, 성신여자대학교에서 석사과정을 시작한 해인 1996년엔 대한민국미술대전 우수상 등 굵직한 상을 받았다. 그 당시 주요 일간지 1면에 날 만큼 권위 있는 상이다. ‘좋은 작품을 하고 싶다’라는 열망을 건실한 방법으로 발산해 온 그는 1990년대 후반부터 2010년대 초반까지 욕망을 키워드로 한 작품을 세상에 내놓는다. 고무줄, 라텍스 고무판 등의 소재를 강하게 잡아당겨 늘였다가 줄였다가 하면서 주름을 만들었다. 겹겹이 쌓인 주름에 수많은 이야기가 숨어들었고, 그 안에서 작가는 욕망을 찾아냈다. “식욕, 수면욕 등 기본적인 욕구를 떠올리면 쉬워요. 어떤 행동을 하게끔 동기를 부여하잖아요. 위기를 극복하겠다는 마음도 욕망이니까요. 그런 면에선 세상을 발전하게 하는 긍정 어린 힘인 거죠.” 그때 작가가 가진 욕망과 지금의 욕망이 어떻게 다른지 궁금했다. 2014년 권치규 작가는 회복탄력성이 타이틀인 전시를 준비하면서 작가 노트에 이렇게 적었다. “회복탄력성, 아주 재밌는 말이다. 몇 년간의 내 작업을 말하기에 아주 적당하다.” 물리학 용어인 이 단어는 물질이 어떤 힘에 의해 변형될 때 복귀하려는 힘을 의미한다. 어떤 일을 원하는 것을 넘어 이제는 최악의 상황에 맞닥뜨려도 재기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다. “욕망과 회복탄력성은 달라 보이지만 동일한 맥락이에요. 우리에게 상황을 바꿀 능력이 있다고 믿는 거예요.”예전에 억지로 고무를 당겨 주름을 만들었다면 이제는 보다 부드럽게 표현한다. 스테인리스스틸을 갈고 닦아 생명의 빛, 연두색을 더한다. 최신작 ‘숲’ 시리즈에선 ‘인간의 삶과 연결된 회복탄력성(bio-resilience)’에 초점을 뒀다. “힐링하고 싶을 때 산으로, 들로, 바다로 가잖아요. 코로나19 사태가 장기간 이어지는 안타까운 상황에 활력을 불어넣는 건 역시 자연이에요. 회복력을 지닌 자연처럼 사람에게도 그런 힘이 있다고 봐요.”
시대를 보는 작가의 시선
사람과 사회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은 작가의 작품이 탄생한 공간은 더없이 특별하다. 1998년 동료 조각가인 김경민 작가와 결혼하면서 경기도 고양에 신혼집이자 작업실을 마련했다. 허허벌판에 놓인 창고를 말끔한 주택으로 만들기까지 수년이 걸렸다. 한때는 이곳을 갤러리 카페로 운영하는 등 대중에게 개방도 해 봤다. 준비가 덜 됐다는 판단에 금세 접었지만, 경험을 발판 삼아 다른 목표를 세웠다. “현재는 작업실로 이용 중인데, 전시실을 분리해서 많은 사람이 오가는 플랫폼을 구축하려고 해요.” 20년이 넘는 세월, 작가는 이곳에서 자신만의 숲을 일궈 냈다. 그걸 증명하는 수많은 조각품이 마당과 집 안을 가득 메우고 있다. 작가의 초기작부터 최신작까지 찬찬히 둘러본다. 마당 한편엔 1996년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 우수상을 받은 ‘제2의 출발선에서’ 시리즈 일부가 자리한다. 실직한 중년이 새로운 시작점에 선 모습을 다각도로 표현한 것으로, 1997년 IMF 외환 위기와 결을 함께한다. ‘시대 상황을 감각 있게 잘 풀어낸 작가.’ 조각가 권치규가 오래도록 품어 온 소망이다. 언제든 회복 가능하다는 메시지를 담은 ‘숲’ 시리즈로 코로나19 사태에 위로를 전한 것도 이 때문이다.
권치규
홍익대학교 조소과를 졸업하고 성신여자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홍익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마쳤다. 1996년 대한민국미술대전 우수상, 2002년 대한민국미술축전 최우수상, 2003년 중국 상하이 아트 살롱 청년 작가상 등을 수상했다. 작품 활동뿐 아니라 한국미술협회 조각분과위원장, 2021년 서울국제조각 페스타 운영위원장 등을 맡으며 다양한 대외 활동에 적극 나서고 있다. 현재 성신여자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