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꼴찌면 어떤가? 자기만의 속도로 달려라”
취업 준비생이던 20대의 안정은에게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전공인 컴퓨터공학을 살려 프로그래머로 취직했지만, 내 길이 아니라는 생각에 6개월 만에 그만뒀다. 승무원의 꿈을 이루기 위해 중국 항공사에 취업했으나 1년간 비자가 나오지 않았다. 합격자 200여 명 중 유일하게 비자를 받지 못했다. 자존감이 바닥을 친 그때, 무작정 달리기 시작했다.
호텔 마케터로 이직한 후에도 주말마다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며 달리기를 이어갔다. SNS에 꾸준히 개인 기록을 올리면서 러닝계 셀럽으로 발돋움했다. 그 결과, 현재 러닝 전도사라는 새로운 직업을 개척하고 마라톤 풀코스 11회 완주, 철인삼종경기 2회 완주, 울트라 트레일 러닝 160km 완주, 사막 마라톤 250km 완주라는 기록을 세웠다. 여태 모은 마라톤 대회 완주 메달만 100개 이상. 취업만 바라보던 20대가 아닌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은 30대 안정은과 함께 달리기에 대해 이야기했다.
요즘엔 어떻게 지내나?
‘탑걸스크루’라는 러닝 크루를 운영하고 있다. 주변 시선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브라톱을 입고 뛰는 여성 러너 모임이다. 서울, 수원에 이어 7월에는 부산에서 진행했다. 매주 토요일 부산으로 내려가 크루원을 이끌고 해운대 일대를 달렸다. 지난 4월에는 경기도 수원 화성행궁 앞에 ‘달리당’이라는 카페를 오픈했다.
러닝 전도사가 된 이유가 뭔가?
취업을 준비하며 힘들었던 20대 시절을 견디게 해준 것이 달리기다. 어렵사리 호텔 마케터로 취직한 후에도 주말마다 마라톤 대회에 참가했다. 주말을 달리기로 알차게 보내고 평일엔 그만큼 열심히 일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달리기는 취미였다. 그런데 업무 스트레스와 건강 문제가 겹치면서 퇴사를 결정했다. 어차피 한 번 사는 인생인데 회사 말고 나를 마케팅해 보자는 마음도 있었다.
러닝 전도사가 하는 일을 설명해 달라
러닝의 즐거움을 많은 사람에게 알리는 일을 한다. 달리기 행사를 기획하는 1인 기업 ‘런더풀’을 설립해 달리기를 메인으로 한 여행을 기획해 왔다. 2019년 달리기 에세이〈나는 오늘 모리셔스의 바닷가를 달린다〉를 출간한 이후, 서울과 제주의 러닝 코스를 소개하는 책을 내기도했다. 다양한 마라톤 대회에서 홍보대사로 활동하면서 러닝 전도사로 이름을 알렸다. 여러 기업, 군부대, 학교 등에서 달리기를 주제로 한 강연도 한다.
강연에서는 주로 어떤 내용을 다루나?
러닝 크루를 운영하며 배운 리더십, 계속해서 출발선에 서는 용기 등 달리기를 통해 실제로 깨달은 내용을 주로 다룬다. 그중 가장 강조하는 것은 ‘같이’의 가치다. 달리기는 혼자 하는 운동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장거리 코스를 뛰어보면 다른 사람과 함께하는 운동임을 알게 된다. 옆에서 발맞춰 주는 동료 덕분에 100km, 200km 코스도 완주할 수 있다.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달리기가 아닌 다른 일을 할 때도 누군가와 조율하는 일에 시간을 쏟기 시작했다.
20대 후반에 달리기를 하지 않았다면?
달리지 않았더라도 이런저런 도전을 많이 했을 것 같다. 그런데 지금처럼 이렇게 짧은 기간에 많은 일을 이뤄내진 못했을 거다. 사람마다 스트레스 해소법이 다르지 않나. 나는 달리면서 모든 걸 풀어낸다. 울면서 뛴 적도 많다. 그러고 나면 다시 시작할힘이 생긴다. 달리기 덕분에 상처를 딛고 일어서는 속도가 빨라졌다.
지난 4월 오픈한 카페 ‘달리당’은 어떤 공간인가?
코로나19 확산으로 지난 몇 년간 힘든 시기를 보냈다. 오프라인 마라톤 대회가 열리지 않으니 답답한 마음이 커졌다. 또 일적으로는 강연 섭외가 취소되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헛헛한 마음에 베이킹을 배우면서 제과제빵기능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훗날 빵집을 운영하면 좋겠다는 막연한 생각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언젠가 제 이름으로 된 빵집을 차릴 수 있지 않을까요?”라는 말로 강연을 마무리하는데, 거짓말쟁이가 된 기분이 들었다. 사람들한테는 이것저것 도전해 보라고 강의하면서 막상 나는 아무런 시도도 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때부터 이리저리 품을 팔아 카페를 마련했다.
어려운 상황에서 돌파구를 찾아낸 것 같다
돌이켜보면 힘든 시기를 보낼 때마다 새로운 길이 열리곤 했다. 중국 항공사에 취업했는데도 비자 문제로 허송세월을 보내면서 대인기피증이 생길 정도로 힘들었다. 그때 가만 있지 않고 달린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지 않나. 마음껏 뛰지 못해 답답한 팬데믹 상황에서 베이킹을 배우고 이렇게 카페까지 오픈했다. 러너 거점 공간으로 만들고 싶은 욕심도 있다. 인생에서 어쩔 수 없이 맞닥뜨리는 하향 곡선이 마냥 최악은 아닌 듯하다.
‘인생은 마라톤과 같다’는 말에 동의하나?
예전에는 취업, 결혼, 출산, 육아 등 남들처럼 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아니다. 모든 사람이 똑같은 목표를 향해 한 가지 코스로 가면 재미없지 않을까. 각자에게 어울리는 코스와 속도가 있을 거다. 그게 산길이든, 잔디밭이든, 꽃밭이든. 가끔은 조금 천천히 달리면서 풍경을 눈에 담아도 좋을 것이다.
다른 운동도 좋아하나?
진득하게 한 가지 취미 생활을 꾸준히 해오진 않았다. 그래도 실내 놀이보다는 야외 활동을 더 좋아했다. 달리기는 힘든 시기를 이겨내게 해준 운동이다. 달리기라도 해야 그날 뭔가 해낸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한창때는 일주일에 아홉 번 달린 적도 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습관이 된 것 같다.
가장 기억에 남는 대회는?
2018년 몽골 고비사막 마라톤에 도전했다. 하루에 30~40km씩 7일 간 총 250km를 뛰어야 한다. 스마트폰 사용이 어렵거니와 제대로 씻을 수도 없다. 6일은 혼자 달리고 마지막 날은 가족이나 친구와 함께 달릴 수 있다. 당시 남자친구와 마지막 코스를 뛰는데 피니시 라인에서 프러포즈를 받았다. 평생 잊지 못할 순간이다.
한 번에 160km를 달리기도 했다고
서울 둘레길 8코스를 논스톱으로 뛰었다. 가수 션, 러너 달씸과 함께 36시간 만에 완주했다. 무박 2일로 진행된 만큼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 중간중간 간단한 식사를 하고 너무 졸릴 때는 10분 정도 쪽잠을 자면서 이동했다. 마라톤을 할 때마다 느끼지만 늘상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온다. 42.195km일 때는 마흔두 번을, 160km일 때는 160번 그만두고 싶다. 그런 스스로를 너무도 잘 알아서 동료와 함께 했다. 서로 격려해 주면서 완주했다. JTBC의 후원을 받아 완주 시 스포츠 꿈나무에게 1000만원을 기부하는 프로그램이었다.
현재 준비 중인 대회가 있나?
미국 보스턴·시카고·뉴욕, 독일 베를린, 일본 도쿄 등 세계 6대 마라톤 중 5개 대회를 완주했다. 오는 10월에 영국 런던 마라톤을 완주하면 세계 6대 마라톤을 모두 완주한 한국 최연소 마라토너가 된다. 4시간 이내에 피니시 라인에 들어오고 싶다. 또 세계 6대 마라톤 완주자에게 주어지는 기념 메달도 기대 중이다. 대회별 메달과 함께 달리당 카페 한편에 진열해둘 생각이다. 메달을 넣을 액자도 준비해 놨다.
달리기 초보에게 조언하자면?
즐거운 첫 경험을 하길 바란다. 그래야 두 번째, 세 번째 러닝을 할 수 있다. 달리기는 조금만 뛰어도 큰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운동이다. 사서 걱정하지 말고 일단 달려봐라. 러닝 크루를 운영하다 보면 초보자 대부분이 무릎이 아프다고 한다. 그럴 때 러닝화부터 살펴본다. 제대로 된 러닝화를 신어야 발목이나 무릎에 부담이 덜 간다. 본인에게 맞는 러닝화와 달릴 수 있다는 용기를 갖고 건강하게 뛰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