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기사
박준 시인의 ‘파주’라는 시에는 “어느 겨울날 연락도 없이 그 집을 찾아가면 얼굴이 붉은 아버지가 목울대를 씰룩여가며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다”는 구절이 나온다. 시인의 표현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는 “매일 반주를 조금씩 마시는 전형적인 아저씨”다. 시인은 중학교 때부터 술을 마셨다. 아버지가 드시던 소주 한 병의 일부분이 늘 그의 몫으로 돌아왔다. “야, 너 마셔.” 그의 어머니도 남다르다. 더운 여름, 학교를 다녀온 시인이 늘 마주한 것은 어머니가 남긴 포스트잇이었다. ‘냉동실에 맥주 넣어놨어. 안 마실 거면 냉장실로’ 그렇게 자유로운 가정환경에서 술을 접했다. “비교육적인 건 아니겠죠?” 우려 섞인 목소리 다음, “긍정적인 부분도 있어요. 호기심에 몰래 술을 구해다가 후미진 곳에 가서 마실 필요가 없었어요”라는 말이 이어진다. “대학생 때는 돈이 없으니까 ‘취할 때까지 맥주를 마셔보고 싶다’는 원초적인 생각을 했었어요. 친구들이 ‘넌 술 얘기만 나오면 좋아한다’고 하는데 진짜 신나요.”
흔들리는 마음에서 빌려온 술
‘신나요’라는 세 글자에 모든 마음이 들어있다. 시(詩)가 아닌 술(酒)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는 주류저널의 요청에 흔쾌히 응한 이유일 것이다. 그는 현재 출판사 창비에 다니고 있다. “시인들은 대부분 다 직장이 있어요. 시가 생계가 되지는 않으니까요.” 박준 시인은 매일 일상과 비일상의 경계에 서있다. 은행 잔고와 같은 일상적인 생각이 문학적이고 예술적인 비일상의 세계로 넘어가는데 가장 효과적인 것은 술이다. 퇴근 후 적당량의 가성비 좋은 싱글몰트위스키를 즐긴다. “그렇다고 술에 취해 글을 쓰는 것은 아니에요.”
술 외에 여행, 음악 오래 듣기 같은 것들이 비일상의 경계를 넘어서는 문이다. 시인은 ‘낙서’라는 시에서 “저도 끝이고 겨울도 끝이다 싶어 무작정 남해로 간 적이 있었는데요//거기는 벌써 봄이 와서 농어도 숭어도 꽃게도 제철이었습니다”라고 말한다. ‘제철에 나는 음식을 제철에 먹는 것’이 그의 취미다. 봄에는 섬진강의 강굴, 여름엔 신안의 민어와 흑산도의 홍어, 가을엔 포항의 과메기와 서천의 박대, 겨울엔 영월의 곤드레, 서귀포의 방어. 그 계절의 맛, 그 지역의 계절, 그리고 비일상의 시간을 즐긴다.
거의 매일 술을 마시지만 취하지는 않는다. 그는 평소에도 힙 플라스크(휴대용 금속 술병)에 위스키를 담아다닌다. “저 술 많이 좋아해요.” 그의 고백이 이어진다. “술 마시면 축제 같아요.” 수줍은 말투에서 진심이 느껴진다. 그의 문학세계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대학시절 친구들과 찬 소주를 마시며 시 한 편에 대해 여섯 시간씩 논한 것.
혼자 밝았다가 혼자 어두워지는 술
처음 시를 썼을 때가 기억나느냐는 질문에 그는 고등학교 2학년으로 돌아갔다. “수의사가 되고 싶었어요. 그래서 개를 열심히 키웠어요.” 개와 교감하는 것이 수의사로서의 자질과 교양이라고 생각했던 것. 그런데 현실은 정반대였다. 대학배치표에는 수많은 학과들이 나열돼 있었고, 수의학과는 너무나도 높은 곳에 있었다. 꿈을 잃은 고등학생은 그 좌절과 막막함을 글로 풀어냈다. “나는 왜 이 모양일까? 나는 왜 나일까? 나는 왜 나밖에 되지 못할까?” 그는 자신이 써내간 그 일기가 자신의 첫 번째 시적인 글이라 했다. “시가 세상의 무수한 자연과 대상을 이야기하는 것 같아도 결국은 나를 이해하기 위한 것이거든요.” 그가 쓴 두 번째 시적인 글은 고등학교 3학년 때 쓴 연애편지. 고백에 성공했냐는 질문에 “잘 될 리가 없죠. 시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 감정의 과잉도출인데 연애편지는 그걸 피할 길이 없어요. 글로 하는 연애가 잘 되는 걸 보지 못했어요.” (웃음)
문인들은 왜 술을 좋아할까? 박준은 평소 본인이 내린 결론을 꺼내놨다. “머릿속에 그리는 아름다운 세계와 현실 세계에 괴리가 너무 클 때 그게 가장 좋은 안주이자 핑계가 되는 것 같아요. 그런 이유로 여러 문인들이 술을 많이 마시고, 술이 주는 위안으로 좋은 작품을 세상에 내놓는 것 같아요.” 그간 선배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정서를 나눈 그의 대답이다.
박준
2008년 <실천문학> 등단. 2012년 시집 발간한 첫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는 2016년 5월, 25쇄를 찍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