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칼럼

[주류저널] 영화 속 술 <캐리비안의 해적>

삶과 죽음 그 가운데 럼

by 우주

럼(Rum)과 사랑(Love) 사이

“배는 항구에 있을 때 안전하지만 그것이 존재의 이유는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은 17~18세기 ‘해적의 황금시대’를 배경으로 당시 해적들의 삶을 박진감 넘치게 그리고 있다. 이 영화의 첫 번째 시리즈 <블랙 펄의 저주>는 한 소녀의 노래로 시작한다. “난 해적이라네. 강탈하고, 노략하고, 훔치고.” 노래를 부른 소녀는 웨더빈 스완 총독의 무남독녀, 엘리자베스 스완의 아역. 엘리자베스 스완 역은 <캐리비안의 해적> 1~3편 여주인공으로 배우 키이라 나이틀리가 맡았다. 아름다운 여주인공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것은 개성 있는 남자 배우들이다. 극중 엘리자베스 스완과 부부의 연을 맺는 윌 터너 역은 올랜도 블룸, 잭 스패로우 선장 역은 조니 뎁이 연기했다. 배우 조니 뎁은 23세 연하 여배우 앰버 허드와 결혼 15개월 만에 이혼 소송을 벌였다. 두 사람은 영화 <럼 다이어리>에서 처음 만났다. <캐리비안의 해적>에서 물마시듯 럼을 마시던 잭 스패로우와 럼의 인연이 더해진 기묘한 순간이다.


세상은 넓고 보물은 많다

해적들은 거친 파도 위를 항해하며 세상의 모든 금은보화를 모은다. 특히 잭 스패로우 선장이 가진 나침반은 북쪽이 아니라 ‘주인이 원하는 곳’을 가리킨다. 잭 스패로우가 원하는 재물, 여자, 복수 등 목표를 돕는 최고의 조력자다. 탁 트인 바다에서 “내가 가는 길이 어딘지 분명하다면” 해적들의 삶은 더없이 평온할 것이다. 다만 바다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태아를 품은 모성애처럼 따뜻하다가도 거친 이를 드러내며 사악해지는 것이 바다. “바다에 악마가 있어. 잔혹한 해적들도 무서워하는”이라는 대사처럼 말이다. 세상에 얼마나 많은 해적이 바다에서 생을 다했으면, 극중 바다에서 죽은 자를 저승으로 인도하는 배까지 따로 설정되어 있을까. 해적들의 삶은 불안정하다. 언제 죽을지 모른다. 육지에 두 발 붙이고 사는 사람은 절대 느낄 수 없는 자유, 그러나 공허함이 공존한다. 그 사이에 럼이 있다.


해적들의 생명수

깊고 고요한 바다 위에서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내일을 장담할 수 없는 삶에 술이 없다면, 온 인류는 이미 오래 전에 미쳤을 것이다. 한 여자, 가족, 그리고 육지에 정착하기에는 너무나 먼 길을 떠난 해적에게 럼은 물이나 마찬가지다.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무조건 마셔야 하는 필수불가결한 술이다. 그 무엇도 그들을 얽맬 수는 없다. 해적정신으로 무장한 자유로운 이 삶에 술이 빠질 수 있겠는가. 잭 스패로우 선장의 표현을 빌리자면, “달콤하고 풍성한 꽃다발과 같은 토르투가의 공기를 한 번도 마셔보지 못한다면 그것은 슬픈 인생”이다. 캐리비안에 위치한 토르투가 섬은 17세기 해적의 본거지로 사용됐다.

그렇다면 그 많고 많은 술 중에 왜 하필 럼일까? 우선 긴 항해에는 상하지 않는 식수가 절대적이다. 물이나 맥주는 금방 상하고, 와인이나 위스키는 상대적으로 덜 상했지만 값이 비쌌다. 도수가 높으면서도 싼 술, 바로 럼이다. 럼은 사탕수수를 발효해 증류한 술이다.

17세기 캐리비안 바베이도스 섬을 식민지화한 영국인들은 섬에 가득한 사탕수수에 주목한다. 이미 증류기술을 통해 위스키를 만들던 영국인들이 사탕수수로 증류주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 독한 술은 사람들을 사로잡았고, 해적들로부터 큰 인기를 얻게 된다.


술잔을 높이 들어 올려라

영화에서 럼은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살린다. 첫 번째 시리즈 <블랙 펄의 저주>에서 무인도에 갇힌 잭 스패로우 선장을 구해준 것은 무인도에서 밀주를 제조하는 사람들이었다. 이어 엘리자베스 스완과 함께 갇혔을 때는 엘리자베스가 밀주제조업자가 만들어둔 럼을 태워 구조대에 신호를 보냈다. 물론 잭 스패로우는 그 많은 럼을 태웠다는 것에 격분하지만. 또한 두 번째 시리즈 <망자의 함>에서는 잭 스패로우를 노리는 거대 바다 괴물 크라겐과 맞서는 블랙 펄의 선원들에게 “화약이 없으면 럼주를 쓰라”는 윌 터너의 지시가 떨어진다. 목숨보다 소중하게 생각한 럼을 투척하라는 명령에 목숨이 걸린 위험천만한 순간에도 선원들은 잠시 주춤하지만, 이내 명령을 받든다.


술이나 마시자

잭 스패로우 선장은 영화 내내 술에 취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니 뎁은 롤링 스톤스의 기타리스트 키스 리처드를 모델로 했다. “해적은 18세기의 록 스타”라는 설정에서 탄생한 잭 스패로우는 너덜거리는 옷에 떡진 머리를 하고, 눈가에 바른 짙은 마스카라는 험난하게 번져있다. 현실에서는 잘 나가는 배우 조니 뎁이지만 영화 속 잭 스패로우는 코를 베일 듯한 악취를 풍기는 인물로 변신한다.

“바다 위에서 엄청난 더위와 습도를 그대로 견뎌야 하는 해적”이기 때문이다. 엘리자베스 스완이 그의 냄새에 인상을 찡그릴 때, 잭 스패로우는 오히려 당당하게 대처한다. 냄새 나는 삶이 더 자유롭다는 것을 이미 알기 때문이다. 해적의 상징은 ‘자유’(Freedom)다. 잭 스패로우가 이끄는 블랙 펄의 진정한 의미 역시 자유다. 그들의 자유로움을 완성해주는 것이 바로 럼이다. 캐리비안의 해적 세 번째 시리즈인 <세상의 끝에서>는 잭 스패로우의 나침반이 럼을 가리키며 끝난다. “술이나 마시자!”(Drink up me hearties yo ho!)라는 그의 외침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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